손목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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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딸애가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에 와서 나보구 손목시계를 얻어달라고 한다. 시험을 보는데 꼭 손목시계가 필요하단다.

“걱정말아, 아빠가 인차 해결해 줄게.” 하고는 그자리로 거리에 달려나가 예쁜 전자손목시계를 샀다.

“딸, 아빠가 응원하니 시험을 잘 쳐야지.”

전자시계를 딸애에게 내미는 그 순간 학교 시절에 팔목에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가 주마등마냥 뇌리를 스쳐지났다.

1970년대 대부분의 농촌생활은 아주 궁핍했었다. 지금은 흔한 것이 시계이지만 그때는 가정기물 가운데 네 가지 큰 기물 (四大件)에 속했다.  네 가지 큰 기물(四大件 즉 라지오, 자전거,  재봉침, 손목시계)만 있으면 부자취급을 받을 때였다. 잘사는 집들에서는 딸을 시집 보낼 때 재봉침을 혼수품으로 사주군 한다. 총각들은 시체멋에 맞게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 류행이였다.

그러나 우리 집 가정형편에 비추어 볼 때 시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 됐고 큰 형님도 대학에 가고 집에 안 계시고 누나도 출가하였고 작은 형님과 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난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작은 형님은 나보다 6 살 많은 1954 년생 말띠이다. 작은 형님은 아버지를 닮아서 체구가 훤칠하고 키가  키고, 구들장 같은 가슴과 실팍한 어깨를 자랑했고, 뼈다귀가 굵직굵직한 장골이였고 솥뚜껑 같은 손과 곰의발 같은 넙쩍한 발을 소유하고 있었다. 제몸에 맞는 옷과 신을 사기가 힘들었다. 작은 형님은 소학교 4 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하고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셨는데 힘장사로 동네에 소문이 났다. 팔씨름은 그 누구도 이기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에서도 일을 잘하고 이상분들을 존중하고 례절 바른 청년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던 차 대대(촌민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로두구강철공장에 가서 림시공(一公一农)으로 일하게 되였다. 로두구강철공장은 로두구 시가지 북쪽에 있는 기차길을 건너 산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장의 꿀뚝에서 내뿜는 지독한 시뿌연 연기때분에 근처의 나무와  잡초도 자라지 못하였다. 작은 형님은 밤대거리를 해가면서 손잡이 뜨락또르를 몰고 뜨겁고 무거운 쇠덩어리를 싣고 나르는 작업을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번 매달 월급을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돈을 모으셨다.

나는 그때에 10여 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향소재지에 있는 고중에 통학하고 있었다. 자전거도 고중에 입학하게 되자 작은 형님이 인차 사준 것이였다. 손목시계가 없으니 불편할 때가 많았다. 간혹 가다 제시간을 장악 못해서 지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한번은 학교를 대표하여 현수학경색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시험장소를 찾느라 헤매고 다니다가 30분을 지각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계를 살 엄두를 전혀 내지 못했다.

작은 형님은 지인의 소개로 평강벌에 있는 마음씨 착하고 수양있는 농촌처녀와 사귀고 있었다. 비록 우리 집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작은 형님의 사람 됨됨이에 마음이 끌린 것 같았다. 형님과 사귀고 있는 처녀는 5 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여났고 두 부모가 모두 계신다. 집안 살림 형편도 괜찮은 편이다. 우리 집 형편에선 감지덕지할 일이다. 작은 형님이 손목시계를 이미 사놓았다는 소문을 듣고 그 처녀는 은근히 결혼선물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방학이면 갈 데가 별로 없었다. 시골에서 나서 자란 터라 친척들도 많지 않아서 놀러 다닐 데가 없었다. 방학을 하게 되면 유일하게 놀러 갈 곳이 작은 형님이 출근하는 로두구 강철공장이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방학이 드디여 왔다. 방학을 하자마자 책가방을 둘러메고 부랴부랴 화룡에 가서 기차를 타고 로두구로 향하였다. 작은 형님은 이미 로두구 기차역에 나와 있었다.

우리 두 형제는 기차역 출구를 빠져나와서 곧추 로투구 시가지에 있는 민족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작은 형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문의하셨다. 마지막에

“공부하는데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런 요구도 제기 하지 않았다.

“범학아, 출세 할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한다. 동생이 공부를 잘하니 형님으로 자랑스럽구나.”하면서 형님은 싱글벙글 기뻐하셨다. 형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걸 처음 보았다.

형님은 술 서너잔 마시고 큰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면서 귀담아 들었다. 큰형님은 화룡일중을 다닐 때 공부를 잘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대학을 갈 기회를 포기하고 학비가 없고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연변한어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되였다. 큰 형님이 입학통지서를 받는 날 우리 마을 촌장은 첫 대학생이 나왔다면서 너무도  기뻐서 황소를 잡아서 온 마을에 잔치를 열었다. 그 말을 하는 형님의 너부죽한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어리였다. 나도 큰 형님처럼 공부를 잘해서 형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졌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작은 형님은 무뚝뚝하게 내 앞에 정교하게 포장한 작은 종이함을 내놓으면서

“범학아, 열어보아라”고 하였다. 인츰 종이함을 열어보는 순간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바로 오매에도 애타게 차고 싶었던 손목시계가 아닌가. 찬찬히 보니 남자용 상해표 손목시계였다. 그러나 인츰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추고 형님께 간청드렸다.

“형님, 이 손목시계는 새 아주머니의 약혼선물로 드리는 것이 좋겠소. 나는 학생이니 아직은 손목시계가 필요하지 않소.”

형님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으시더니

“사양 밀거라, 이 일은 새아주머니와 이미 상의하고 결정한 것이란다. 새아주머니가 학생이 시계가 더욱 필요하다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더라.”

난 너무나 기뻐서 어쩔 바를 몰랐다. 그저 작은 형님에게 술을 한잔 따라올리고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고 감격의 눈물만 흘렸다.

그날 손목시계를 차고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온 세상의 기쁨을 혼자 독차지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공부를 잘해서 출세하면 형님과 아주머니한테 새 옷 한 벌을 사 드리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하였다.

세월이 40여 년이 지나고 작은 형님도 이젠  70 세를 바라보는 로인이 되였다. 자식들은 출가해서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다. 작은 형님은 근로하고 가만히 노는 성격이 아니여서 지금도 개체양봉업을 하고 있다.

나는 형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출세해서 대학교수로 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작은 형님 내외에게 새옷 한벌을 흐드리겠다던 맹세는 여지껏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나 형님은 그처럼 어려운 형편에도 자신을 희생하고 안해까지 희생하여 동생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받침돌로 되여주셨다. 꼭 가진 것이 있어야만  돕는 것이 아니다.  형제를 돕고 타인을 돕는 일은 형편이 되고 안돠고를 떠나 온 마음을 다할 때에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아빠, 응원 덕분에 래일 시험을 잘 볼게요”

기뻐하는 딸애를 바라보는 나의 귀전에는 40 년 전, 귀한 손목시계를 내 왼손목에 걸어주시던 형님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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