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너는 내 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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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 창문부터 열었다. 새벽에 퍼부은 비로 창문란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투명한 비방울, 금방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신경이 쓰인다. 어쩌면 구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님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힘겹게 지탱하는 모습처럼 보여서 마음이 무겁다.

시어머님은 원래 왜소한 체격이였는데 지금은 몸이 더 많이 말랐다. 검은 머리 한올 없는 새하얀 머리, 얼굴은 온통 조글조글한 주름뿐이고 정기 없는 두 눈은 항상 그리움에 젖어있다. 내 마음속에 여직껏 큰 산처럼 자리잡고 내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던 시어머님이 점점 늙어가는 모습도 안따까웠지만 그보다는 웬지 자꾸 나를 멀리 밀어내는 것 같아서 더구나 마음이 허전했었다.

지난 여름의 어느 날, 시어머님께서 랭면이 먹고 싶다고 먼저 련락이 왔다. 음식 중에서도 식당 랭면을 특별히 즐겨하셔서 치아가 좋지 않으면서도 랭면 한 그릇을 다 비우시군 하는 시어머님이셨다. 그런데 그 날은 나에게 반나마 갈라놓고 몇점 안되는 소고기도 나의 랭면 그릇에 놓아주고 나서 내가 먹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던 시어머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자 랭면값을 기어코 자기 지갑을 열어 지불하시더니 입술을 자꾸 감빨면서 머뭇머뭇하다가 입을 열었다.

 

“큰애야, 인젠 너에게서 생활비를 그만 받을란다. 아들이 없는 며느리에게서 지금까지 생활비를 받아 쓴 것만 해두 고맙구나. 남편 없이 어렵게 사는 딸이라면 내가 그 손에서 달마다 꼬박꼬박 생활비를 받았겠냐?”

남편이 돌아가신 후에도 전에 드리던 대로 달마다 꼬박꼬박 생활비를 드렸던 나에게는 너무도 뜻밖의 말이여서 저으기 당황하기까지 했다.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시어머님이 말을 이었다.

“둘째 며느리와 작은 아들 그리고 딸까지 생활비를 푼푼하게 주니까 내 쓰기에는 넉넉하구나.”

어머님은 나름대로 나를 위안하느라고 설명하시는 말씀인 줄 알면서도 나는 서운한 생각이 앞서서 며느리로 애쓰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순간적으로 쓱 스쳐지나갔다. 결혼하여30여년 동안 나는 한해도 빠짐없이 시부모님의 생일상을 차려드렸고 설명절에도 딸 노릇보다는 며느리 노릇을 먼저 하느라고 단 한번도 친정에 가본 적이 없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에는 살림형편이 그닥 넉넉하지 않았지만 시부모님의 환갑생일을 깨 풍성히 차려드렸다. 요즘처럼 화려한 호텔이 아니라 집에다 친척들과 손님을 모셨다. 출근하면서 점심시간에 채소를 사들이고 다듬고 저녁에는 손님상에 올릴 메뉴를 정하면서 어떻게 하면 빈틈없이 준비할가 수 없이 고민했다. 하다보니 환갑생일을 치르고 난 이튿날에는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남편이 돌아가셨어도 끝까지 며느리노릇을 잘하려고 예전 못지 않게 정성을 다해 챙겨드리려고 애를 썼고 시어머님께 드리는 생활비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남편이 채 하지 못한 효도를 대신 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그런데 어머님은 인젠 나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 못할 서러움이 가슴에 차올랐다.

원래부터 끔찍히도 며느리를 아끼는 시어머님이셨다.

딸이 어쩌다 음식을 가리면 야단을 치는 시어머님이였는데 내가 시집온 지 30여년이 되도록 내가 싫어하는 양념과 음식은 철저하게 가려주셨다. 결혼하고 1년은 시어머님과 같이 살았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늦게 집에 들어와서 시어머님이 챙겨놓은 점심을 혼자 먹게 되였다. 감자볶음채를 한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는데 내가 먹지 않는 양념 냄새가 나서 슬그머니 뱉어버린 나는 먹는둥 마는둥한 채 숟가락을 놓고 출근하였다. 저녁 밥상에서 시어머님은 정심에 감자채를 왜 안 먹었는느냐고 물었다. 내가 민망해서 대답 못하고 눈치만 보는데 남편이 얼른 대신 말했다.

“감자채에서 양념 냄새가 나서 못 먹었답니다.”

그후로 시어머님은 식구들이 먹는 반찬에도 내가 싫어하는 양념을 전부 넣지 않았다. 30여년동안 김치도 두가지로 담갔다. 시어머님은 개탕을 그렇게 즐겨하시면서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 나 한 사람 때문에 여직껏 집에서 개고기를 삶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시어머님은 딸에 대한 사랑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아껴주고 지켜주었었다.

남편을 저세상에 떠나보내고 나서 슬픔 속에서 헤여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시어머님이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큰애야, 너 뭘 먹지두 못하구 이러다 큰일난다. 너 애들 곁에 가거라.”

시어머님이 하도 등을 떠밀어서 나는 아들딸이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되였다. 시어머님은 공항까지 나오셔서 목메인 소리로 당부하셨다.

“애들과 같이 즐겁게 살면서 힘든 마음을 싹 다 털어버리고 오너라.”

공항의 모든 검사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시어머님은 그때까지 그 자리에서 손을 저으며 눈굽을 찍고 계셨다. 반년동안 나는 애들 곁에서 몸도, 마음도 추스리고 돌아왔다. 시어머님은 한밤중인데도 따뜻한 밥과 소고기국을 끓여놓고 기다리셨다. 시어머님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머리가 새하얗게 세고 얼굴도 몰라보게 초췌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내 등을 떠밀어보내면서 너만 슬픔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아무 걱정 없을 것 같다고 하시던 시어머님이셨다. 시어머님은 자식을 앞세우고 재가 된 마음을 깊숙히 감추면서 언제 한번 며느리 앞에서 시름놓고 우시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는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항상 안해인 내가 더 슬프고 아픈 줄만 알았다. 내가 없는 사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저렇게 로쇄해졌으랴 싶으면서 가슴이 저리도록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그러던 지난 가을, 시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인젠 귀도 어둡고 행동도 많이 불편했다. 나는 시어머님이 즐겨드시는 가지밥을 해드렸다. 밥맛이 돌지 않는지 정심을 대충 드신 시어머님이 침실과 거실을 오가며 뭔가를 찾아보는 것 같더니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나를 앞에 불러앉혔다.

“큰애야, 이젠 저 사진들을 치우거라.”

너무도 뜻밖의 말씀에 나는 깜짝 놀랐다. 시어머님이 내 침실에 모셔져있는 남편의 채색령전사진을 두고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나는 인차 알았다. 하도 충격적인 말씀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는 나를 시어머님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큰애야, 넌 할 만큼 했다. 인젠 가슴에 묻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하거라.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내 눈치를 볼 것 없다.”

그 말을 듣는 나는 울컥 설음이 솟구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럼 이젠 저는 어머님 며느리가 아니란 말씀인가요?”

“며느리가 아니지.”

너무도 단호한 시어머님 말씀에 나는 서운한 마음이 밀려와서 낯선 사람을 보듯 시어머님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내 마음을 진작에 짐작한 듯 시어머님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넌 그 날부터 며느리가 아니라 내 딸이였다.”

순간, 의미심장한 시어머님의 말씀은 그대로 망치가 되여 내 심벽을 쾅쾅 두드렸다. 나는 그만 시어머님의 품에 와락 안겨 한참을 소리내여 울었다. 벌써 여덟 번이나 바뀐 춘하추동의 그 나날들이 필림마냥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거나 하얀 눈이 내리는 날 어두운 방구석에서 남편의 령전사진을 안고 울 때마다 어김없이 핸드폰 너머에서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군 했었다. 그렇게 시어머님은 항상 묵묵히 알게 모르게 나의 곁을 지켜오셨다. 그동안 시어머님한테서 친정엄마 같은 진한 향기를 저도 모르게 느껴왔던 나날들이였다.

물론 “그날부터 너는 내 딸이였다”는 시어머님의 깊은 뜻을 한순간에 다 터득한 건 아니였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어느 때부터인가 시어머님의 사랑 방식은 예전보다 달라져있었다.

남편이 돌아가고 지난 어느 겨울에 시어머님이 오른팔목이 골절되여 깁스를 하고 오래동안 고생하셨다. 그동안 머리를 감겨드리고 빨래를 해주고 식사를 챙겨주면서 수발을 들어오던 나는 어느 날 몸을 씻겨드리려고 목욕물을 받았다. 여직껏 목욕만은 절대 내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딸을 부르는 바람에 한번도 목욕을 시켜드린 적 없는 나였다. 그러던 시어머님이 며느리가 아니라 딸처럼 스스럼없이 온 몸을 나한테 맡겼다. 시어머님의 믿음에 가슴이 뜨거워진 나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힘드는 줄 몰랐다.

지난해 여름에 시어머님이 급작스레 아프셔서 연변병원 급진에 가셨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시어머님은 어지러워 눈도 못 뜨고 토하기만 했다. 아들딸이 옆에 있었지만 시어머님은 내 목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나의 손을 잡더니 힘없이 얘기하셨다. 내가 귀를 바싹 대고 들어보니 어느 옷장에 내가 해드린 한복이 있는데 그것을 입혀주면 령감과 큰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말씀인 것 같았다.

“어머님, 아무 걱정 마세요. 돌아가시게 되면 어머님이 원하는 옷을 제 손으로 입혀드리고 아버님 옆에 정히 모시겠습니다”

며느리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오로지 딸만 할 수 있는 말이 내 입에서 나가는 순간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어머님은 나를 벌써 허물없는 딸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여서 며느리나 딸이 별로 구별 없다고 하지만 시어머님 년세의 로인들에게는 딸과 며느리는 분명 달랐다. 흔히 시어머니는 며느리보다 딸을 더 아끼고 며느리와는 일정한 간격을 두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봄볕에는 딸, 가을볕에는 며느리”라든가 “죽 먹은 설겆이는 딸 시키고 비빔밥 그릇 설겆이는 며느리 시킨다.”는 것 같은 말이 있지 않을가? 그런데 시어머님은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져 살고 있는 며느리더러 새로운 삶을 찾아 살아가게 하려고 마음속에 딸로 받아들인 지가 오랜 것 같다. 어머님의 그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한 나는 그저 매사에 고까운 생각부터 앞세웠다. 며느리의 눈으로 바라봤으니 시어머님 처사가 고깝게 생각됐던 것이지 딸의 눈으로 바라봤더면 전혀 고까울 일들이 아니였다. 이제야 나는 야속하게 느껴졌던 일들조차 사랑이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시어머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게, 이제라도 딸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제까지 소란스럽던 마음이 친정어머니 품속에서처럼 평온해진다.

“너는 그 날부터 내 딸이였다.”

피보다 더 진한 시어머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오늘은 그리움이 잔잔한 행복으로 다가온다.   

               《연변문학》2021,1


“그날부터 너는 내 딸이였다” 에 하나의 답글

  1. 시고라 아바타

    한지인의 소개로 2016년 8월에 문학아카데미 수업에 참가하였다.
    첫 수업시간이였다. 연변문단의 유명한 시인 석화선생님의 명강의와 사회 각계에서 모인 기업가, 사업가, 가정주부 등 여러신분의 여성들이 당당하고 예리하게 문학을 담론하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었고 그 속에서 내 모습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문학공부가 6 ~ 7년이 흘렀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되었고 아픈 순간이든 기쁜 순간이든 글 감으로 다듬어 적다보니 삶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지금은 매일매일 삶의 내용과 목표가 있고 당당한 내 모습을 볼수 있고 지면에서 내 이름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십여만자에 달하는 “사랑을 입력하다” 의 두툼한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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