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울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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돐도 되기전에 아버지를 잃은 나에겐 집이란 곧 엄마였다. 엄마가 있기에 나에겐 집이 있었고 집이 있었기에 나의 두 어깨는 늘 힘있어 보였다. 어릴 때엔 멀리에서도 우리 집 구새통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피여 오르는 것이 보이면 너무도 좋아 “어 엄마가 있네…”하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허리에 두른 책보 안에서는 도시락속의 숟가락이 ‘달랑달랑’ 나의 발걸음에 맞춰 신나게 박자를 치던 일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우리 집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입쌀이 난다는 소문높은 구수하벌의 ‘다부락’에 있었는데 마을에 들어서면 노오란 토흙으로 제일 곱게 매질한 깨끗한 집이 바로 우리 집이였다.

봄이면 살구꽃, 앵두꽃이 곱게 피고 여름이면 울바자 안의 푸른 채소들이 탐스럽게 자랐다. 각담 아래 호박꽃도 수집게 웃고 함박꽃과 난쟁이 채송화도 곱게 피였다. 집벽을 타고 지붕까지 올라간 하얀 박꽃들이 어느새 가을을 맞아 둥그런 박이 되여 매달렸고 지붕 우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들은 정든 집으로 어서 오너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겨울이면 문풍지도 윙윙 노래하는데 집안에서는 우리 형제 화로불 주위에 모여앉아 가시옥시 팡팡 튀기면서 웃음꽃을 피워 길 가던 사람들도 호기심에 우리 집문을 열어보던 ‘행복의 집’이 였다.

서른한 살의 나약한 젊은 과부가 네 오랍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겹고 고달팠으랴만 내 눈에 엄마는 그렇게 꿋꿋해보였다. 말끔하게 얹은 숱많은 검은 머리에는 늘 하얀 수건을 두르고 날씬한 몸에는 흰 저고리, 깜장치마를 입은 엄마는 그야말로 <슬픈 족속>에 나오는 조선족 녀인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늘 엄마를 “불로집 큰며느리” “광종댁” 혹은 “영자엄마”라 불렀기에 갓 이사온 집들에선 이 집이 나그네도 없는 “새파란 과부집” 인줄을 더욱 몰랐다.

그때는 과부라면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눈길로 보았다. 그런데 엄마가 “과부”, “과부집 자식들 그렇겠지”, “애비 없이 자란 놈들 그렇겠지” 하는 소리를 “죽기보다 싫은 소리”로 여겼기에 우리 집을 아시는 분들은 절대 “과부집” 이란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엄마였기에 자식들에게 “례절교육”과 “사람으로 되라” 는 교육이 첫째였으며 늘 “량반” 교육을 하였다. 허나 생활이란 책대로 안되는 것이였다. 엄마는 강한 성격이므로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지만 나는 세번 ‘엄마의 눈물’ 을 보았고 ‘집이 울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

연변1중을 갓 졸업한 큰오빠가 대학입학시험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있던 어느날이였다. 오빠가 뒤마을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어느 집 마당에서 주고받는 두 장년의 말소리를 듣게 되였다.

“저기 저 학생이 그 앞마을 과부집 애 아니오? 올해 뭐 대학시험을 쳤다는 그 애요?”

“옳소. 애비두 없는데 대학에 간들 무스게 그 돈을 대겠는지… 쯧쯧…”

“전번에 배 도적질했다는 그 애요? 과부집 자식이니…”

들려오는 험담소리에 발끈 성이 난 우리 오빠가

“내가 왜 애비 없음둥? 말들 주의하십소. 난 당당하게 충주김씨 가문의 6대 장손이구 김광종의 큰아들이꾸마. 내가 왜 애비 없는 자식임둥? 과부집 자식이문 어쨌슴둥? 불쌍한 울 엄마를 모욕하지 맙소…”

“허, 그 자식, 너 애비 없으니 과부집 자식이라는데… 버르장 머리 없는 놈이구나!”

“예? 그래 과부집 자식이 어찜둥? 왜 매나네 과부집 과부집 하면서 그램둥?’

“그 자식 너 정말루 과부집 자식 맞구나. 어른들과두 막 덤벼들구…”

더욱 성이 난 오빠는 옆에 보이는 막대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쥐구

“그래 우리가 못산다구 업시봄둥?” 하며 달려들었다.

하여 서로 욕지거리와 때릴 잡도리를 하다보니 한사람 두사람 모여들고 어느 누가 엄마한테까지 알려 큰일이 벌어졌다. 엄마도 허둥지둥 달려왔다.

“뭐요? 과부집이 어쨌는데? 뭐 우리 애가 배를 몇개 훔쳐 뜯어먹었다구 큰 도적임둥? 과부자식? 이 과부집이 아즈바이네들 못살게군 게 있슴둥? 왜 불쌍한 애들까지 욕함둥…” 

엄마가 앉아서 땅을 치고 넉두리를 하면서 통곡하는 바람에 온 동네가 들썩하였다. 그 바람에 싸움은 저절로 끝나고 결국엔 한 마을에 사는 삼촌과 오빠가 엄마한테 무릎을 꿇고 빌고 그 아즈바이도 빌고 또 빌어서야 엄마는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우리 형제들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고 우리도 엄마 따라 엉엉 울었다.

그날 밤, 엄마는 밖에 나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데 이상하게도 창창한 밤하늘 여기저기에 별찌가 수 없이 떨어졌다. 엄마는

“저 별찌는 너희들 아버지가 슬퍼서 흘리시는 눈물이지…” 하면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시는데 얼굴에는 작은 내물이 두줄기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것은 ‘집이 울던 날’, 내가 본 첫번째 ‘엄마의 눈물’ 이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엄마는 얼굴에 웃음이라곤 볼 수 없었고 수걱수걱 열심히 일만 하시였다. 그 여린 몸으로 두엄끄기로부터 후치질까지, 수레를 몰고 비료를 내고… 아무리 곤란하여도 힘들다는 소리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때 당과 정부에서 사랑의 손길을 보내왔으며 가끔은 보조금, 조학금, 장학금을 주어 생활난을 해결하게 하였다. “물 마실 때 우물판 이를 잊지 말라”고 엄마도 이 은인을 잊은 적 없었고 열심히 일했건만 어찌 대학교, 고중, 초중에 다니는 세 자식들의 학잡비와 숙사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으랴.

엄마는 부득불 고향을 떠나 연길시에 이사왔고 “돈이 된다”는 일은 다 하셨다. 하기에 오라지 않아 허술한 창고같은 집이라도 장만하고 세 자식 공부 뒤바라지도 할 수 있게 되였다. 그런데 또 큰일이 일어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늦가을의 어느 날 밤 10시가 넘었을 때였다. 우리 형제가 공부하는데 문득 창문밖이 불길로 붉게 물드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 엄마, 밖에 불이… ” 내가 지쳐서 잠든 엄마를 흔들어 깨우니 놀란 엄마는

“빨리 소리쳐…”하고는 허겁지겁 물바게쯔를 들고 문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불길은 사정없이 타올라 지붕에 매달리려고 하는데 나는 너무도 급하여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겨우 쇄된 소리로

“불, 불이야, 불이야, 방조해줍소…”하였더니 삽시간에 집집이 달려나와 물을 나르고 구새를 번지고 짐을 나르고 하며 야단법석을 쳤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불은 인츰 꺼졌지만 집 안팎은 수라장이 되였다.

그래도 주인집 바깥량반이 사람 좋게 웃으면서

“사람이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나. 아즈마이 불난 집이 잘 산다꾸마. 다 잘 될 게꾸마.”하시였다.

엄마와 둘째 오빠가 깍듯이 인사하고 나는 목이 꺽 메여 그만 벙어리가 되였었다. 우리 식구는 대강 잠자리를 마련하고 뜬눈으로 그 밤을 지냈고 이튿날 아침도 대수 걸치고 수라장이 된 집에 열쇠를 잠그고 엄마는 또 일하러 나갔다. 그날 오후에 우리는 학교에서 청가를 맞고 집에 돌아왔다.

오후였다. 둘째 오빠네 담임선생님이 남학생 10여명을 우리 집의 구새 세우는 일을 방조하라고 보내왔다. 그리고 동네의 장정들 네댓명이 와서 제꺽 구새를 세우고 엄마더러 불을 지펴보라 하고는 모두들 돌아가셨다. 엄마는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오빠와 나는 구새통만 바라보았다. 이윽하여 삼단같은 연기가 터져올랐다. 너무 기쁜 나머지 목이 꺽 멘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손시늉 절반으로

“내… 내…굴이 나감다. 엄마…”하고 엄마에게 알리니

“그래? 그럼 됐다…”

손과 얼굴이 검대기로 얼룩지고 헝클어진 머리도, 옷매무시도 너무나 불쌍하고 가련한 엄마가 그 동굴같은 부스깨 앞에 서서 왕왕 울고 있었다. 나는 밖에 대고 오빠를 부르고는 또 “엄마”를 부르면서 엄마의 손을 잡아 부엌에서 올라오게 했다. 나는 꺽 멘 목소리로 울먹거리였다.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되였는데… 엄마 울면 우리는 어쩜까?”

“아니다. 모든 일이 너무두 고마워서 저절로 울게 되는구나. 마을분들두 또 둘째네 반주임 일두… 잊지 말자꾸나.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보답해야겠다…”

이렇게 말하면서 서글피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선 또 시내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내물은 감사의 마음을 가득 실었음을 오빠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밖에 큰비가 오면 집안엔 작은 비가 와서 우리 형제는 물그릇을 줄지어 놓는 일에 바빴지만 비가 끊으면 또다시 벽을 하얗게 회칠하고 천정을 알뜰히 도배했다. 그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엄마와 나는 왠지 하냥 즐거웠다… 

어느덧 과부집 자식들도 성장하여 하나 둘 조국과 인민 앞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이 나라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인재로 자라났다. 큰오빠는 중국과학원에, 둘째 오빠는 대학교 교수로, 나는 중학교 고급교사로 되여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당년의 ‘새파란 과부’ 엄마도 어느덧 회갑잔치를 맞게 되였다. 병풍을 두르고 붉은기를 벽에 걸고 큰상을 받았다.

큰오빠가 엄마에게 정중히 첫술잔을 부어올리였다. 

“어머님,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 잔을 받으십시오.”

그런데 술잔을 받아든 엄마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일어나더니

“아니오.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소.” 하셨다. 모두들 의아해서 엄마를 바라보는데

“이 술잔은 먼저 당에 드리오. 당이 없었다면 우리 집은 언녕 박산이 났을 것이고 애들도 공부를 못했을 거요. 당은 우리 중국을 구했고 또 우리집을 살렸소. 내가 어찌 그 은혜를 잊겠소. 지난 날을 회억하면 어떻게 오늘까지 왔을가 하면서 눈물부터 앞섭니다…” 엄마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그만 흑흑 느끼며 울고 말았다.

엄마가 울자 큰언니가 “와~” 하고 엄마를 붙잡고 울어 그만 회갑집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큰오빠가

“엄마 말씀이 맞습니다. 당이 없었다면 새 중국이 없을 것은 물론이고 우리 집의 오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동네 여러분들의 방조와 지지도 큰 힘이 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구 우리 엄마는 ‘위대한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엄마의 일생은 오직 이 집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 일생입니다. 이 모든 것을 어찌 잊겠습니까?…”하는데 엄마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웃음을 담고 고운 한복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찍으며 말했다.

“이 잔은 고마운 당과 조국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렇게 ‘집이 울던 날’에 흘리던 ‘엄마의 눈물’을 세번 보아왔다.  

옛말같은 우리 집 이야기를 쓰는 이 시각도 나의 마음은 또다시 울컥해난다. 나의 ‘새파란 과부엄마’가 걸어온 아리랑 고개길 우엔 엄마의 쓰라린 눈물이 뿌려져 고운 꽃들이 피여났다. 꽃보다 아름다운 엄마의 눈물, 아침 이슬보다 더 맑고 순결한 엄마의 눈물은 그 꽃들에 떨어져 더욱 황홀하게 빛나고 그 향기는 오늘도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준다.

나는 퇴직후 인생 후반기에 후에없는 인생을 살아 가야겠다는 일념을갖고 이것 저것 해보다가 결국엔 우리말 우리글을 지켜가면서 교육적 가치가있는 이야기 즉 엄마가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들로 딸들그리고 후대들에게 전해보려고 필을 들게 되였다. 이것도 나의 의무라 생각 되였다. 그러나 문학 기초가 없이 글을 쓴다는것은 참으로 힘든일이였다. 하기에나는 석화문학원에서 일면 문학공부를하고 일면 시작해 보았다. 


제일처음으로 우리집의 ” 이불 이야기 ” 를 발표했는데 대박나게도 중국 중앙 조선말 방송 및 해외한국 kbs 방송에서 우수작으로 되여 방송되였다. 그후로 련속 “아버지의소원 ” “5 점짜리가 대학교 교수로” “엄마의 학교”… 등을 써내여 역시 중국 연변 , 한국, 조선등의 간행물에 실리게되여 대담히 ”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 소책자를 편찬하였다. 그외에도 가사들이 노래로 제작되여 매주일가로도 울려 펴지게 되였다.그중 “색바랜사진 한장 ” 이라는 이노래는 일년 매주일가 총결산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외에도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하여 붓을날려 서예에서도 각종 상을 받아안는등의 영예를 따내였다. 
지금도 석화문학원에서 글쓰기를 배우면서 인생 후반생을 빛나게 가꿔가고 인생의 즐거움을 펼쳐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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