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BC 551 노(魯)나라~BC 479 노나라.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생애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자기).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사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必也正名乎),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君君臣臣),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父父子子)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사회적으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盡己),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強惡)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強惡)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隱者)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利]보다는 뜻[義]를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였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사(士)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정치관
공자가 [상상]]에 있어 목표로 삼은 것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층 인사로서 인격의 완성체인 이른바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 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 정치적 능력 ·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공자는 군자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를 위한 경전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의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과 주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 등 종래의 전통을 익히고 이어가는 데 마땅한 서책들을 교범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공자는 노나라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춘추》를 편찬하는 동안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 본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군자 양성을 목표로 한 공자식 교육의 내용이란 전통을 계승하는 데 적합한 교범의 숙달 및 난세로 치닫는 현실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눈이라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하였다.
철학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이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는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당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서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가 예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 하였으며 또한 공자와 자하의 대화에서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는 비유를 들어 예의 근본에 대해 강조한 것에 따르면 공자의 ‘예’는 외면적 사회규범의 측면도 가지지만 그 바탕에 정직한 마음(直)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자사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공자의 사상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를 왕족, 즉 은나라의 후예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제적인 질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요즘 공자의 가르침을 논구할 때는 이런 점은 거의 도외시된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종법제적인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주나라였으며, 주나라의 종법-봉건제는 위의 천자를 중심으로 그 밑의 공후백자남의 五爵, 公卿大夫, 士 그리고 民을 위계로 하는 체제이다. 즉, 공자는 민주주의나 대중주의보다는 군주정에 더 친화적인 인물이었으며, 공자가 말한 예 또한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행하게 하고, 제후나 귀족 같은 지배계급의 윤리를 설파한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예나 문화하고는 거리가 있는, 탈속적인 道家와는 달리, 세련되고 법도를 갖춘 문명화된 생활을 공자는 좋아했으며, 이러한 세계의 정점은 바로 천자를 위시로 하는 주나라였다.
또한, 원시 유가에서 주로 말해지는 군자 또한 돈, 재산이 오늘날의 재벌들처럼 많지는 않아도, 엄연한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그들은 일정 정도의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의 경제적 배경이 향촌의 중소지주층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그들의 학문을 전개하고 수양관을 펼쳐나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왕실적인 특징은 묵자와 비교해봐도 금방 드러난다. 묵자는 천민출신의 사상가로, 공자가 엘리트적, 군주친화적이었던 것에 비해, 묵자는 민중적이었고 피지배계급의 목소리와 특성을 그대로 그의 사상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한국에서 공자를 논할 때, 이런 계급적 요소, 경제적 요소를 도외시하고 순수한 사변철학이나 아니면 순전히 仁과 義 같은 도덕 차원으로만 공자의 사상을 논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주류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하고, 이들이 쓰는 문자를 한자라 하여 중국의 정체성은 漢나라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이 많다. 하지만, 중국이 ‘중화’라는 개념으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지난 2000년 동안 통일된 문명체를 이루고 이어져 왔음을 고려할 때, 중국은 한나라 이상으로 하은주의 삼대와 특히 주나라에 기대고 있는 것이 많다. 천명(天命)개념이 그러하고, 오늘날 중국인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황제 같은 위인들은 전부 이 때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이 중화, 즉 정통 화하족의 감수성을 건드렸으며, 그 감성을 활용하여 文質彬彬한 주나라의 시대를 그리워했고 중국인들도 이 성인의 가르침을 좋아하며 크게 따랐던 것이다. 이것은 외래종교인 불교와는 구별되는 것이었고, 출세간을 말하는 도가(道家)하고도 뚜렷한 차별점이 있어 세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흠모와 존숭이 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난 역사 동안 수없이 많은 황제와 전제왕조들은 공자와 그 사상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빼어난 철인이었으며, 그가 지향한 세계는 천하위공(天下为公)이 실현된 대동사회였고, 그는 요나 순 같이 인격을 갖춘 성인을 지향하였다.
비록 당대의 사회가 대동이 아닌, 그보다 한단계 낮은 소강사회였다고 한들, 즉, 나의 소유물이 없는 이상세계인 대동이 아니라 천하가 일가(一家)의 소유물이 되는 소강사회였다한들, 공자가 지향한 것은 분명 대동이었다. 그 세상은 모두가 행복하고 서로가 서로를 형제와 부모처럼 여기는 세상이며, 인자함이 실현된, 세상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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