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려행을 아주 즐긴다. 려행의 의미란 단순한 경물관광이 아니라 보고 듣고 체험하는 가운데서 시야를 넓히고 마음가짐을 조절할수 있는 계기가 되여야 진정한 려행이라고 생각한다. 려행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고 자신의 세계를 풍부히 하는 과정이다. 려행을 다니면서 세상에 대해 더 알아가는 느낌 또한 값지다. 지난 일본려행에서 얻은 소감이 바로 그러했다.
일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후지산(富士山)이다.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명산으로 소문이 높다. 머리에 백설을 떠이고 흰구름이 산꼭대기에 동동 떠있는 신비한 산, 눈이 덮인 채 고독하게 바다와 호수 우에 우뚝 솟아있는 듯한 후지산은 수 세기 동안 화가와 시인들에게 령감을 주었고 순례 려행의 목적지였다고 한다.
일본려행을 떠나면서 나는 후지산을 볼 수 있다는 흥분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려행일정에 따라 우리는 나고야에서 출발하여 후지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일본의 유명한 후지산을 보러 간다는 기쁨에 기분이 둥둥 떴다. 우리 일행을 태운 관광뻐스는 후지산 기슭을 빙빙 에돌아 정상으로 향했다. 길 량옆에는 봄을 맞아 나무들이 푸른 옷을 입고 있었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풍경은 없었다. 후지산으로 올라가는데 4월에도 산정상에 눈이 쌓여있기에 안전을 기해 정상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규정되여 있었다.
후지산은 산기슭으로부터 산정상까지 10 단계로 분류된다. 일본말로 쥬고메(十合目)라 한다. 우리가 오른 지점은 시고메(四合目)였다. 눈 덮인 정상까지 아직 멀었다. 그곳까지 오르니 확실히 날씨가 추웠다. 산기슭의 따뜻한 봄날씨와 달리 여기는 아직도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차에서 내리면서 보니 인도사람, 아프리카 사람, 영어를 하는 외국인들, 각국의 관광객들이 몰려와 있었다. 나도 사람들 틈에 끼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후지산을 멋지게 그려봤던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석이물에 범범이 된 흙우에 길다란 마른 나무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고 볼멋이 전혀 없었다. 물론 정상에 올라가 보면 느낌이 다르겠지만 시고메에서 본 후지산은 명산이란 느낌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별로였다. 그래도 우리는 기념비 앞에서 후지산에 왔었다는 인증샷을 남기려고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유감스러운 마음으로 다른 코스로 향했다. 후지산 아래 호수가에는 아름다운 벗꽃이 무성하게 핀 공원이 있었고 샘물이 퐁퐁 솟아나는 마을이 있었다. 후지산은 그 주변의 관광지들로도 사람들을 끈다고 한다.
후지산을 떠나 우리는 일본 수도 도쿄로 향발했다. 도쿄에서 우리는 유명한 스카이타워를 참관하고 벚꽃이 만발한 도심속의 황가정원이였던 신쥬큐공원에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도꾜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 연도 풍경을 구경하면서 후지산 부근에 들어섰을 때였다. 관광뻐스안에서 갑자기 환성이 터졌다. 날씨가 좋아서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후지산이 바라보인 것이였다. 사진 속에서 보았던 명산 후지산의 모습을 제대로 똑똑히 보았다. 갈 때는 날씨가 흐려서 보지 못했던 진짜 멋있는 후지산을 돌아갈 때에야 보게 된 것이였다. 후지산에 올라갔을 때와 달리 멀리에서 바라보는 후지산이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푸르른 하늘아래 흰구름이 원추형모양의 산꼭대기를 휘감아돌고 머리에 흰눈을 떠이고 아아히 솟아있는 후지산,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였다. 너무나 멋있었다. 우리는 환성을 올리며 차안에서 목을 빼들고 내다보았다. 정녕 사진에서 보아오던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였다. 후지산에 올랐을 때 지척에서 보아내지 못했던 그 아름다움을 멀리에서 바라보고 나서야 느끼는 이 환희감에서 나는 거리감이 있어야 더 신비하고 아름답게 보인다는 말이 진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름다운 후지산을 뒤로 하면서 우리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으며 생활 속에도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움을 흔상하는 데는 일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거리감이 있음으로 하여 상상과 현실의 차이가 생겨난다. 아름다움의 뒤면에는 옥의 티처럼 사물 그 자체의 국한성이 있을 수 있다. 일본려행에서의 후지산 인상도 그러했다. 멀리서 볼 때 그렇게 아름답던 후지산도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는 그 보기 싫게 드러난 흙이며 가로세로 넘어진 나무들… 상상을 깨뜨린 실망뿐이였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후지산의 전체 이미지를 부인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가슴 설레이게 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어떨 때는 현실에 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중국의 산수화를 보라, 가깝고 먼 거리감을 두며 그려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먼산은 멀리서 보는 것처럼 몽롱하게 느껴지게 하고 물도 깊은 산속에서 흘러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산속에 가보면 혹시 나무가 람벌되여 있을 수도 있으며 물도 이미 말라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서 본 산수화는 의연히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리감이 가져다주는 미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래왕도 거리감을 두면 더 좋을 수 있다. “군자는 물처럼 담담하게 사귄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거리를 두면 대방에 대해 객관적으로 리해할 수 있고 대방의 미세한 결점에 대해 지나칠 수 있을 것이며 피차 융합이 더 잘 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고슴도치가 꼭 붙어있으면 서로의 가시에 찔릴 수 있으나 조금 사이를 두고 있으면 서로 온기를 나눌 수도 있고 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거리감은 시각의 다른 한갈래 방향이다. 거리감을 가지면 서로에게 공간을 남겨주어 편안하고 자유롭다. 거리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대방을 료해할 수 있게 한다. 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는 한 사물에 대해 가질 수 없을 때는 아름답게 생각하지만 일단 가졌을 때에는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르는 그런 경향이 있다. 얻기 힘든 물건일수록 가지려는 욕망이 더욱 타오르지만 쉽게 가질 수 있는 물건일수록 아낄 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식물도 그렇다. 너무 빼곡히 심어놓으면 잘 자라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너무 가까이 있으면 감정이 쉽게 파렬된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늘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불만이 많다. 이것도 잘못이요, 저것도 마음에 안 드오 하면서 나무라기 일쑤다. 매일 함께 붙어있으면 우점도 단점으로 보이고 성격상의 마찰도 날이 감에 따라 더욱 심해진다. 친근한 사람에게도 일정한 거리감을 남겨두면 좋지 않을가? 서로에게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자유를 주면 거리감이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서로 상처를 주는 일이 없을 것이 아닐가? 또 이런 생각도 든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데서 전면을 보고 평가하고 우점을 더 많이 보아야지 단점만 찾아보고 확대시키면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이 생기는 법이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 한면으로 보고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거리감이 아름다움을 산생시킨다는 말이 있다. 거리감과 미감 지간에는 확실히 풍부한 인생철리가 존재하고 있다. 많은 경우 거리감을 두어야 독특한 미감이 산생할 수 있다. 일단 거리감이 없어진다면 미감도 따라서 소실될 수 있다. 친구 지간에도 거리감이 필요하다. 함께 했던 친구 사이에 너무 가까이 접촉하면 금이 갈 수도 있다. 때문에 우정에도 거리감이 필요하다. 우정에 적당한 거리를 두면 우정은 거리감으로 인한 그리움이 생길것이고 그리움은 또 사람으로 하여금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할 수 있다. 우정은 꽃향기와 같다. 너무 진한 향기는 오래가지 못하지만 담담한 향기는 오래가며 사람들에게 여운을 남겨준다.
가까이에서 본 후지산과 멀리서 바라본 후지산에 대한 단상으로부터 나는 거리감에 대한 계시를 받았는 바 그것이 바로 이번 일본 려행에서 얻은 수확 중의 하나였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한 치 보기로서 세상에서 자기만 잘났는가 여긴다. 려행을 다니다 보면 사물을 보는 시각과 태도에 일종의 변화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려행은 우리의 기질을 개변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안광을 더 높이, 더 멀리 내다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