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여덟살 나던 해 언니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였다.
진한 눈섭에 정기 도는 쌍겹눈, 덩실한 코마루, 영준하게 생긴 얼굴에 중점대학 학력까지… 바로 내가 오래동안 마음속으로 그려봤던 리상형이였다. 평생 시집 갈 것 같지 않아 로심초사하던 부모님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 날 그 남자를 보고 내가 결혼까지 하겠다고 선뜻이 나섰으니 아마 우리 둘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임이 틀림없는가 보다.
시골에서 태여난 그는 째지게 가난한 종가집 맏아들이였다. 그 때까지 련애 한번 못해본 총각이 소개로 나를 만났던 것이다. 나이 들어 만난 우리는 랑만적인 데이트도 별로 못해보고 얼마 안 지나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변변치 않은 살림을 시작하였다.
잘생긴 남편한테 시집 가서 좋아하기도 잠시, 결혼한 후부터 나는 때때로 남들로부터 우리 부부가 짝이 기운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분명히 도시 처녀가 시골 총각한테 시집 갔는데 남편이 아깝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쁘다 하기에 아쉬울 나의 외모에 트라우마가 생길 만큼 심각해졌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 몇개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집 온 첫해였다. 섣달 초사흗날, 나는 남편의 뒤를 따라 첫걸음으로 시어머니의 언니 집으로 설인사를 가게 되였다. 활달한 성격인 나는 평소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을 만큼 담대한데 아무래도 시집이여서 ‘독’이 있는지 그 날 따라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을 눅잦힐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그것도 장가를 간 뒤 첫걸음이라 남편은 문을 열고 들어서기 바쁘게 소리 쳤다.
“마다매, 내 왔소. 우리 처도 같이 왔소.”
칠순이 넘는 큰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살짝 긴장되여 몸 둘 바를 몰라하는 나를 큰어머니는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말씀하였다.
“새기 그리 밉지 않구나 뭐. 성복이는 제 각시보다 더 밉다더니 성복이 각시보다 더 곱네.”
성복이란 남편의 이종사촌형님이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대학생이였던 그 형님은 가문의 자랑이였는데 소문 나게 미운 녀자를 안해로 맞아 한동안 쩍하면 말밥에 올랐다. 그후부터 가문에서 누가 녀자를 데려오기만 하면 그 분과 비교하여 외모를 저울질하군 하였다.
그 때 나는 자존심에 퍼그나 상처를 받았다. 얼굴이 후끈거려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였다.
나는 나를 이쁘게 못 낳아준 부모님이 한스러웠고 내 자신이 한없이 하잘것없어보였으며 가끔 가문이나 밖에서 우리 부부가 짝이 기운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잘생긴 남편마저 원망스러웠다.
잘생긴 데다 학력까지 높은 남편이랑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가? 나는 이쁜 꽃병 같은 녀자보다는 내조를 잘하여 남편을 성취시키는 든든한 안해가 되려고 내 앞날의 륜곽을 그려보았다.
그리하여 남편이 모 시 령도로 전근하게 되자 나는 잘 나가던 내 사업도 접고 친지와 친구 하나 없는 낯선 고장에 가정주부로 따라왔다.
남편이 전근 간 도시는 심한 빈곤도시였고 많은 단위들에서 열달 동안이나 월급을 발급하지 못한 만큼 상황이 심각하였다. 남편은 모든 정력을 빈곤퇴치에 몰부었다. 그동안 집은 잠만 자는 려관처럼 드나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안해인 나에게 직장을 해결해준다는 건 말이 안된다면서 남편은 나더러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다.
남들은 령도 부인이라고 부러워했는데 사실 나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외롭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름 대로 컴퓨터도 배우고 글도 썼지만 온 하루 감옥생활이란 게 따로 없었다. 남편한테 얼룩이 질가 봐 함부로 동네에 나서서 수다도 떨지 못했고 맘대로 나가 놀 수도 없었다.
그 때 마침 남편 동료 분의 부인 리씨를 알게 되였다. 사정이 비슷했던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속심말도 나누면서 동병상련의 인연을 맺게 되였다.
몇년 뒤, 나와 리씨는 빈곤퇴치에서 두각을 나타내여 승진하게 된 남편들을 따라 함께 연길에 오게 되였다. 연길 태생인 나와 달리 그녀에게 연길은 낯설고 물선 고장이였고 따라서 연길에서의 생활도 익숙치 않았다. 그녀를 하루빨리 연길생활에 적응시키겠다고 나는 나름 왼심을 썼다.
어느 하루, 우리는 함께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 이 옷 저 옷 입어보는데 우연히 남편의 또 다른 친구의 부인인 박씨를 만나게 되였다. 반가운 마음에 둘을 서로 인사시키고 보니 시간도 어느덧 점심때라 나는 둘을 데리고 근처 식당에 찾아 들어갔다.
항상 열정이 넘치고 남의 인정을 받는 게 즐거웠던 나는 그 날 두 친구한테서 점수를 많이 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 나는 리씨와 헤여지고 한동네에 사는 박씨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박씨가 말을 던졌다.
“오늘 처음 본 그 리씨 말이요. 별로 곱지 않습데. 되게 밉습데. 제보다 더 밉습데.”
이쁘지 않은 리씨를 말한다는 게 그만 불똥이 나한테 튈 줄이야… 순간 박씨는 자기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면서 련달아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재 제 뭐랬소? 뭐? 나보다 더 밉다고?”
“우— 내 어째 입이 이렇게… 어찔가? 어찔가? 근데 하긴 제 별루 곱지야 않지믄 양?”
단가마 우에 올려진 개미처럼 어쩔 바를 몰라 쩔쩔매던 박씨가 내 눈치를 보며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 녀자 나하구 미운 걸 비기면 어림두 없지. 연길에서 내가 2등이라 하면 누가 감히 1등에 도전할가.”
솔직히 나를 대놓고 밉다고 말하는 박씨가 미워나면서도 나는 시원하게 유머로 넘겼다.
나중에 박씨가 하는 말이 그 날 남편과 그 일을 얘기했더니 “당신도 참, 하도 아주머니가 마음이 넓고 그릇이 크니 지금까지 당신과 어울리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없었을걸.”라고 핀잔하더란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만나면 가끔 그 때 일을 외우군 한다. 며칠전에도 우리는 또 만나서 그 때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수다를 떨었다…
이제는 내가 되려 나 자신을 미운 녀자라고 할 만큼 이에 너그러워졌다.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보니 별로 부끄러운 일도 아니였다. 그동안 나는 왜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꼭 외모로만 평가해야 된다고 생각했을가? 나는 누구의 짝진 미운 털이 아닌, 아름다운 나 자신으로 되고 싶었다.
내가 몇년간 남편을 내조하면서 주부로 지내는 사이 한때 같이 사업을 시작했던 친구들은 이미 엄청나게 성장하여있었다. 큰 기업을 꾸린 이들도 있었고 미용병원이나 식당, 무역회사 등 여러 분야에서 사장이 되여 잘 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가뜩이나 이쁘지 않은 외모에 남편 내조를 하느라 집에만 있다보니 멋 부릴 줄도 모르는 시골아줌마가 된 느낌이였다.
어떻게 하면 나를 성장시켜 급변하는 이 시대에 빨리 적응할 수 있을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와중에 나는 한 친구의 소개로 연변대학 녀성기업문화연구반 제3기생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였다. 그랬다, 나를 탈바꿈시킬 수 있는 건 배움이였다.
그후로 18년간, 나는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여러가지 공부를 닥치는 대로 하였다. 과학기술대학 최고경영자과정도 마쳤고 연변의학원 영양사자격증도 땄고 심리학, 교육학 등 분야의 지식을 두루 섭렵했다. 스스로도 성장해가는 나 자신이 뿌듯하였다.
녀자들의 관심사인 미용 분야에도 흥취를 느낄 즈음에 마침 모 미용병원 원장과의 친분으로 그 미용병원에 초빙되여 출근하게 되였다. 미용업계에서 일을 하다보니 나의 미적 감각도 훨씬 업그레이드가 되였다. 그 덕에 나이보다 젊어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솔직히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르겠다.
몇해전 친구의 어머님 병문안을 갔다가 그 곳에서 남편과 함께 사업했던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분은 능력도 있고 외모도 이쁜 멋진 녀성이다.
그사이 만난 지 5년도 넘어 되는지라 우리는 옛날 이야기며 남편 따라 외지로 가서 내조하고 고생하던 이야기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었다. 얘기중에 문득 그 분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사모님, 어디라 찍어 말하긴 어려운데요. 진짜 멋 있게 변했어요. 예전보다 더 젊어지고 더 이뻐졌어요.” 이쁘다는 칭찬을 듣기 싫어하는 녀성은 없을 것이다. 특히 나 같이 평생 이쁘다는 말을 못 듣고 산 사람한테는 그 한마디가 천금이나 다름없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나는 집에 오자 바람으로 시뚝해서 남편한테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실로 가관이였다.
“당신이 좋아할지는 모르겠다만 내 알려줄가? 그거 말이요, 더 미워질 데 없어서 예전보다 이뻐졌다는 그런 말을 듣는 거요.”
더 미워질 데 없는 녀자라… 그래도 이제는 마음이 여유롭다. 아름다움은 꼭 이쁜 외모에서만 오는 게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문학, 서예, 화술, 경영 등 공부를 하면서 쌓아진 자신감이 마음의 여유를 찾아준 게 아닌가 싶다.
올해, 내가 작사한 노래 〈즐기며 살아보세〉는 연변의 음력설문예야회에서 렴수원가수가 불러 히트를 쳤고 또 내가 작사한 〈아름다운 고향〉은 매주일가로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방송되였다. 또한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불우이웃을 돕고 리더십강의를 통하여 1,500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이제는 누가 나를 밉다고 해도, 남편과 짝이 기운다고 해도 무섭지 않다. 아니, 이제는 그런 말이 다시는 들려오질 않는다.
“이쁜 녀자와 한번만 살아봤으면…” 하고 늘 롱담하던 남편도 요즘은 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김작가님이 말이여, 중앙조선말방송국의 객좌강사고 작사한 노래도 음력설문예야회에 나왔어.”라고 부부동반 모임에서도 남편은 나를 자랑하기에 바쁘다.
‘미운 녀자’, ‘미운 안해’는 다만 외모로 평가받던 옛날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70세를 바라보는 지금은 인물도 권리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였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의지하는 동반자로, 고독을 달래는 부부로 살고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성페염으로 인해 집에 꼼짝 않고 있던 비상시기에 20여년을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불시에 배꼽에 부스럼이 나면서 고역을 치르게 되였다. 남편의 로할아버지가 남편과 같은 나이에 똑같이 부스럼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기에 가슴이 섬뜩하면서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 치료를 받고 또 내가 집에서 처치를 해주고 식단을 조절해가면서 살뜰히 보살폈더니 남편은 끝내 호전되였다. 일찌기 집체호에서 간호사로 있으면서 배웠던 기술과 영양사자격증을 따면서 배워뒀던 음식솜씨가 큰 도움이 되였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이쁜 안해보다는 나 같이 내조를 잘하고 성격 좋고 나름 성취도 이룬 ‘미운’ 안해가 낫더라며 손을 잡아주는 남편을 보니 행복하기만 하다. 예전에는 더 미워질 데 없는 녀자, 오늘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자아성장을 거듭하며 나 자신의 가치를 찾은 녀자, 그런 나의 행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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