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중국 용정 태양향 중평촌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다니고 조양천 제1중학교에서 수십 년 동안 수학교원으로 근무하였다. 2004년 정년퇴임 후 위쳇 “해란강문학성”, ⟪연변녀성⟫, ⟪청년생활⟫ 등 잡지와 중국의 “중앙인민방송”, “연변라디오방송”, “연길아리랑방송”, “연길텔레비방송” 및 한국의 ⟪신한국문화신문(우리문화신문)⟫ 과 계간 ⟪문학시선⟫, 계간 ⟪시조사랑⟫, “한국 KBS 방송”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
칠월이다. 칠월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칠월의 조국산천은 더욱 싱싱하게 푸르르며 칠월의 거리는 행복이 넘쳐흐르고 있다.나는 저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장백산의 미인송을 꺾어 붓으로 삼고 천지물 먹물로 삼아 뚝 찍어 저 푸르른 하늘가에 큼직히 “은인”이라 써보고 싶다. 그러면 이 나라 아니 이 세상, 이 땅우의 모든 사람들이 볼수있을 것이니…물 마실때 우물판이 잊을수 없듯이 나도 우리집을 구해주신 은인-위대한당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머나먼 옛날,우리의 조상들은 일제의 강점하에 나라 잃고 고향 잃고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이나라 중국땅에 오셨다. 나의 엄마도 여섯살에 삶은 감자와 감자떡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조선 갑산으로부터 밤낮으로 자기 엄마의 손을 잡고 산과 들을 지나 두만강까지 왔었다한다. 검푸른 두만강을 바라보니 너무도 무서웠지만 자기 아버지의 쪽지게에 앉아 강을 건느고 엄마의 엄마는 어린 동생을 업고 보따리를 인채로 강을 건넜다한다. 그 눈물겨운 모습을 영원히 잊을수 없어 엄마는 나에게 그 몇번이던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많은 두만강도 눈물겨운 그정경 지금도 잊지 않고 사품치며 흐르고 있다. 세상 까마귀는 검다고 중국의 지주도 악착스러워 엄마네가 중국에서의 생활 역시 늘 막막했었다 한다. 엄마가 서른한살 되던해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하고 광복을 맞아 모두가 한없이 기뻐했건만 나의 엄마에겐 또 “갱길”이 떨어졌는지 앞길이 더욱 막막했다한다. 1946년 10월 놈들의 세균전의 영향이였던지 온 마을엔 이름모를 “머저리 전염병”이 휩쓸어 우리집에도 8살난 큰오빠를 제외하고 몽땅 병에 걸려 집둘레엔 새끼줄을 쳐서 경계선으로 하고 오도가도 못하였다한다. 그 전염병으로 끝내 온집안의 기둥인 아버지가 저세상 가시여 엄마는 통곡하다 기절하여 쓰러졌었다. 그런데 돐도 안되는 어린 나는 젖을 찾아 허둥지둥 기여가서 엄마 가슴에 매달리고 언니 오빠들도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한다. 삼촌도 기가 막혀 어쩔줄 모르고…그 울음소리 메아리쳐 장백산의 폭포도 흐느끼였다. 며칠 지난후 엄마는 삶이 귀찮아 먼저 어린 나를 입양시켜 달라고 삼촌에게 말하여 삼촌도 기가 막혔지만 방법이 없어 살길을 찾게 하려고 입양시키기로 하였다한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애가 입양되어 남의 잔등에 업혀 집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하늘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어린것의 얼굴에도 떨어졌는지 애는 그만 놀라서 와-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한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처량했던지 엄마는 그만 소스라쳐 놀라 애를 찾고 헝크러진 머리, 맨발바람으로 문을 박차고 문설주 부여잡고 “애를 주오-내 애를, 가져가지 마오…”하고 소리치더란다. 엄마의 그 처량한 소리에 하늘도 그만 뚝뚝 아니 줄줄줄 눈물을 쏟더란다.바로 눈물겨운 이때 은인은 달려왔다. 은인은 달려와서 약도 주고 쌀도 주고 사랑도 안겨주었다. 차차 집안의 병세도 호전되고 경계선도 없어지고 눈부신 해살이 우리집을 비추었다. 정부에선 토지개혁을 하여 땅 없는 농사군 엄마에게 땅도 주고 사랑도 주고 힘도 주고 호조조도 꾸려주어 엄마는 눈물씻고 일떠섰고 부녀들의 앞장에 서서 걸싸게 일하고 집안에선 행복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더란다. 엄마는 즐거움 속에서 은인의 가르침하에 중국공민으로 되였고 연변조선족자치주 건립에 더없이 기뻐하였단다. 은인은 또 학교 문앞에도 못가본 엄마에게 문맹퇴치의 길을 열어주어 우리집에 야학교를 세우고 엄마는 엄마의 학교에서 이름자도 써 못보던것이 소학교 4학년 졸업장까지 받아안아 늘 즐거움 속에서 힘든줄 모르고 일하였단다.어느덧 애들이 커가고 우리 형제가 소학교, 중학교, 고중까지 련속 가게되자 집에는 경제난이 또다시 찾아들었다. 엄마와 우리 형제는 부지런히 가마스를 짜서 학비와 외지 숙사비를 해결해야 했기에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그때 삼촌도 난처하여 술만 마시면 우리집에 와서 “큰오빠는 공부를 잘시키고 작은 오빠와 나는 중학교만 필업하고 엄마를 도와 일하라 ”라고 하였다. 사실 밤을 새가면서 가마스를 짜도 힘들기만 하였다. 그러나 은인은 이런 곤란을 보고만 잊지 않았다. 은인의 품은 따사로웠다. 은인은 사랑의 손길을 보내며 때론 생활보조금을 보내왔고 또 학교에서 조학금을 발급하여 곤란을 해결시켜 주었다. 후일 큰오빠가 대학교에,작은오빠가 고중에, 내가 중학교에 다니게 되자 엄마는 더는 농촌에서 학비를 댈수가 없어 무작정 연길시로 이주하여 돈을 벌었단다. 후일 사범학교 교직원 식당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이곳에서도 그 은인은 늘 엄마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어 경제난을 해결하여 애들을 공부시킬수 있었다.은인의 가르침은 등대인양 우리 형제들을 이끌었다. 우리 형제들은 “제2생산력인 지식으로 무장하라”는 은인의 가르침에 따라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오빠는 중국과학원에, 작은오빠는 대학교 교수로, 나는 중학교 고급교원으로 그리고 큰언니는 도문고무공장의 차간주임으로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다.은인은 이렇게 우리를 성장시켰을 뿐더러 우리가 가는길을 밝혔고 당을 위해 나라와 인민을 위해 더 힘내라 하였다. 하여 우리 네남매는 모두 붉은기 앞에서 선서하였고 진붉은 당휘를 달고 그대따라 초요사회를 건설하는 중국꿈을 실현하는 위대한 사업에 뛰여들고 나래치였다. 그제날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것없던 우리집은 늘 행복의 웃음꽃이 피여 있었고 영원히 은인을 잊지 않았다. 하기에 엄마의 회갑날에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손수 첫술잔을 은인이신 당과 모주석님께 드린다면서 모주석 초상을 우러러 술한잔 올려 모두 눈물을 쏟던 이야기도 있다.은인, 내 맘속에서 영원히 지지않는 위대한 당이여!그대는 우리집 은인이고 억만인민의 영원한 은인이십니다.나는 빛나는 당휘를 가슴에 안고 그대의 가르침따라 영원히 나아갈것입니다.
1945년 중국 용정 태양향 중평촌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다니고 조양천 제1중학교에서 수십 년 동안 수학교원으로 근무하였다. 2004년 정년퇴임 후 위쳇 “해란강문학성”, ⟪연변녀성⟫, ⟪청년생활⟫ 등 잡지와 중국의 “중앙인민방송”, “연변라디오방송”, “연길아리랑방송”, “연길텔레비방송” 및 한국의 ⟪신한국문화신문(우리문화신문)⟫ 과 계간 ⟪문학시선⟫, 계간 ⟪시조사랑⟫, “한국 KBS 방송”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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