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삼총사(三銃士)는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1844)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총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온 가스코뉴 출신의 하급 귀족 다르타냥이 총사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를 만나 벌이는 모험을 그리고 있는데, 후에 삼총사는 단짝으로 지내는 세 친구를 의미하는 관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였다.
연변에서는 김봉웅, 김관웅, 김호웅 형제를 “조선족문단의 삼총사”라 부른다. 말하자면 광주김씨(廣州金氏)네 팔남매 중 문학에 종사하는 세 형제를 지칭하는 메타포라 하겠다. 이들 삼총사는 개혁개방 후 연변문단에서 뛰어난 총명과 근면성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학문에 정진해 빼어난 실적을 쌓은 대표적인 평론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삼총사의 가정배경과 성장과정, 특히 문학을 하게 된 원인과 과정을 알아보고 나서 이들 각자의 성격적 특징과 학문적 업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2. 삼총사의 성장 배경
김봉웅, 김관웅, 김호웅을 비롯한 그들 팔남매는 평생 자동차 운전기사와 정비사로 일해 온 김병기(金秉紀)와 리영순(李英順)의 자식들이다.

모친:리영순
김병기는 평양 태생으로서 대동문 부근에 있는 장별리라는 곳에서 나서 자랐다. 장별리라고 하면 지금 평양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나 어른들은 대개 알고 있다. 《중외일보》 1929년 3월 8일 자로 <평양 장별리에 흉기 강도, 대금업 박씨 집에 침입, 범인의 종적은 杳然> 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장별리는 큰 시장거리였는데 김병기는 어릴 적에 늘 대동문 옆에 있는 부자 백과부네 집 마당에 가서 놀았다고 했으니 장별리 역시 대동강과 멀지 않은 곳인 것 같다. 김병기네 동갑또래들은 백과부네 집 마당에 가서 놀다가 떡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으면
“할머니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면 백과부는 시물시물 웃다가
“적게 먹고 가는 똥 누면 부자가 되는 거여.”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김병기의 아버지 김명복(金明福)은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머리가 총명했는데 과거시험을 보려고 사서오경을 얼음에 박 밀 듯이 줄줄 외웠다고 한다. 하지만 한말(韓末) 이후 나라의 기운이 쇠하고 과거시험제도가 없어지자 대서업(代書業), 즉 남을 대신하여 글씨나 서류 따위를 써 주고 일정한 보수를 받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차차 어지러운 세상을 꾸짖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더니 날마다 곤드레만드레 취해 살았다. 어느 날 이 어른이 또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오는지라 노모가 있다가
“어이구, 이 꼴 보지 말고 내가 어서 죽어야지!”
했더니 이 어른이
“어머니, 거 칼도마에 식칼 좀 얹어주세요. 제가 술 안 먹기로 맹서를 하지요.”
하는지라 지독한 노모가
“여봐라, 게 누가 없느냐? 저 어른께 얼른 도마에 칼 얹어 드려라.”
하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앉았지요. 머슴애가 마나님의 불호령에 부들부들 떨다가 칼도마에 식칼을 얹어 대령하자 이게 웬 일인가! 이 어른이 칼도마에 왼손 식지를 내놓고 식칼로 탁― 하고 내리 찍었다. 시뻘건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데 이 어른은 흰 바람벽에 “今日禁酒”라고 휘갈겨 쓰더니 한 옆으로 쓰러졌다. 봉당에 떨어진 식지가 풀떡풀떡 뛰더란다.
술 맹세는 무슨 맹서라 했던가, 김명복은 바람벽에 혈서를 썼지만 일주일도 더 가지 않아 그 식이 장식으로 술을 퍼마셨다. 그걸 본 김병기는 “술만 퍼마시다가는 가정도 자식도 다 망치는 법!” 하고 평생 술에는 별로 입을 대지 않았다. 더더구나 팔남매를 키우느라고 술과는 거의 담을 쌓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 법, 이들 형제들은 다들 술을 즐긴다. 흉을 보아서 죄송하지만 개중에는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이들도 서넛 있다.
김병기가 만주에 들어온 것은 1935년. 몇 해 전에 김명복은 벌써 세상을 뜨고 말았다. 김병기는 무슨 기술을 배워야 일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김병기는 어머니와 아우 병일이, 그리고 누이동생 셋을 두고 무작정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갔다. 하지만 이 때는 일본이 위만주국을 조작해가지고 대륙침략을 꾀하면서 일본인들도 개척이민으로 만주에 보내던 때라 김병기는 사나흘 유치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김병기는 내친 김에 만주행을 단행했다. 먼저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에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국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날마다 자전거 짐받이에 약을 싣고 안산, 무순 등지에 약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두어 달 지나니 자전거를 타고 그야말로 마술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1937년 10월 25일 봉천국제경기장에서 열린 제3회만주자전거선수권대회 2만 미터 결승에서 우승을 했고 1938년 제4회 만주자전거선수권대회에서는 3천 미터 우승을 했다. 1938년 8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생이 봉천과 신경을 방문했을 때 김병기는 손기정을 보고 국제체육무대에서 조선인들을 위해 영예를 날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손기정은 그의 어깨를 쳐주면서 도쿄올림픽에서 만나자고 했다. 김병기는 1940년 도쿄에서 열리게 될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강훈련을 시작했으나 대련과 여순 간 아스팔트길에서 연습하던 도중에 버스에 부딪쳐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더더구나 1940년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올림픽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라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김병기는 자전거운동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전거운동을 더는 할 수 없게 된 김병기는 자동차운전을 배워가지고 흑룡강 목단강으로 가서 병원의 트럭을 몰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일본군과 그 가족들은 병영과 자동차 따위들을 던지고 뿔뿔이 도망을 쳤다. 목단강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이 여기저기 전리품을 산더미처럼 모아놓고 지키고 있었는데 암시장에서 구한 워드까 한 병만 찔러주면 아무 물건이나 가져가게 눈을 감아주었다. 아버지와 그 외 동업자 둘은 자동차부품을 떼여다가 자동차를 조립하였다. 두 대를 조립해 한 대를 동북민주연군에 헌납하면 다른 한 대는 자기가 가질 수 있었다. 반 년 남짓이 품을 들여 트럭 세 대를 동북민주연군에 헌납하고 세 대는 동업자 셋이 각각 한 대씩 가지고 운수업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정국이 뒤숭숭해서 피난을 가는 부자들의 이삿짐을 실어주면 그 무렵의 화폐로 한 자루씩 받았다고 하니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사문동(謝文東), 마희산(马喜山)과 같은 비적들이 들끓는지라 도무지 트럭을 몰고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1948년 트럭에다가 일가족과 가산을 싣고 야반도주해서 연길에 오게 되었고 길동자동차주식회사에 등록하고 계속 운수업을 했다. 물론 그 때 트럭은 목탄차였다. 말하자면 조수가 목탄을 때서 증기기관을 가열시켜 달리는 차였다. 김병기는 소처럼 부지런히 일했고 그만큼 잘 살았다. 1950년대 초 김병기의 외동딸 김옥자가 연길시중앙소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자동차집 공주를 보려고 교장선생님까지 학급에 찾아왔더라고 한다. 하루건너 김병기네 마당에서는 화롯불에 구리적쇠를 놓고 소고기를 구워먹었고 그는 로렌스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다.
하지만 1956년 중국에서는 공업과 상업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를 한다고 하면서 사인자산을 국유화하는 운동을 벌렸다. 백화상점 주인은 백화상점을 내놓아야 했고 자동차 주인은 자동차를 내놓아야 했다. 역시 공사합영으로 개인트럭을 국가에 바친 후 김병기네 가세는 급전직하로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연달아 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한 자식들의 학비를 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김병기는 보물처럼 아끼던 로렌스시계도 팔고 계도마다 이식으로 나오는 200원도 몽땅 자식들의 학비로 바쳤다. 1960년대 3년 재해 때에는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김병기는 날마다 남들이 퇴근한 후에는 공량을 운반하던 차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수십 대의 트럭을 후비고 쓸고 해서 낟알을 한 포대씩 가지고 왔고 가을철이면 온 식구가 산에 들에 나가서 이삭을 주었다.
하지만 김병기 내외는 억척스럽게 일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해서 팔남매를 충실하게 키웠고 등소평의 시대를 맞아 한 해에 아들 넷이나 대학에 입학하는 쾌거를 일구어내기도 했으며 팔남매 중에 박사, 교수 다섯이나 두었으니 연변에 소문이 날만도 했다. 김병기 내외는 천륜지락을 누리다가 몇 해 전 3년을 사이 두고 96세와 8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3.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김봉웅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병기네 가족이 연길에 와서는 단 한 번도 이사를 하지 않았다. 워낙 좋은 동네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연길의 원래 이름은 국자가요, 해방 후에도 시골냄새가 풀풀 나는 작은 시가지였다. 하지만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특히는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정부 수립 이후 주정부의 소재지로서 용정을 앞질러 조선족의 서울 같은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만과 북만에 있는 조선족문인들까지 속속 모여들어 새롭게 조선족문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연길시 중앙가(후에는 광명가, 지금의 유경호텔 부근)에는 많은 대학교 교수와 문화예술인들이 살고 있었다. 김병기네 집은 72조와 73조 사이에 있었다. 트럭은 공사합영으로 국가에 바쳤지만 이 동네에서는 김병기네 집을 여전히 “자동차집”이라고 불렀다. 트럭이 서있던 넓은 뒷마당은 이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었다. 이 동네를 두고 김병기의 셋째 아들 김관웅은「별들의 동네」라는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우리 집과 제일 처음부터 가까운 이웃으로 몇 년간 살아온 이웃으로는 연변가무단의 초대단장이며 가사를 쓰기도 했던 김태희 선생네 일가였다. 우리 집처럼 자식이 많은 김태희 선생의 부인과 우리 어머니는 아주 가까운 이웃으로 오순도순 다정하게 살았다. 나는 나보다 여덟 살 연상인 큰형을 통해 ‘조이종자 이삭도 짓노랗고, 쉬종자이삭도 짓노랗고’로 시작되는 <좋은 종자 가려내세> 라는 가사를 이웃집 김태희 선생이 지으셨다는 것을 알고 어린마음으로 얼마나 존경했는지 모른다. 그 뒤 우리 형제들이 문단에 등단한 후에도 김태희 선생의 장자인 평론가 김기형 선생과도 좋은 인연을 이어왔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김태희 선생네 일가는 아래개방지에 있는 연변가무단 사택으로 이사를 가고 그 집에는 채택룡 선생네 일가가 이사를 하여 왔다. 우리 집과 채택룡 선생네 일가 사이에 그때 맺어진 인연은 60년 세월이 흘러 지난 오늘까지 끈끈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채택룡 선생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첫아들로 태어난 채영춘씨는 나와 동갑이라 소학교 6년을 한 학급에서 공부하였다. 우리는 채택룡 선생이 지은 가사에 허세록 선생이 곡을 붙인 <새아리랑>, <베짜기노래>를 채영춘이랑 함께 부르면서 자랐다.
채택룡 선생이 억울하게 우파감투를 쓴 후 정치적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간 뒤에 채택룡 선생네 집에는 <연변문학> 편집부의 편집원이였던 한수동 선생네 가족이 이사를 하여 왔다. 이 인연은 후일에도 계속 이어져서 나의 첫 번역작품인 미국 단편소설의 명수인 오 헨리의 단편소설 <경찰과 찬송가>와 나의 처녀작 단편소설 <청명절>은 모두 한수동 선생의 손을 거쳐 발표되었다.”
이 동네에는 또 연변예술학교의 가야금 연주가 김진 선생, 《천지의 맑은 물》이라는 유명한 민담집을 펴낸 정길운 선생, 동요시인 리행복 선생, 시인 임효원과 김철 선생네 가족도 살고 있었다. 이밖에도 이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리욱, 김창걸, 김례삼, 김학철과 같은 연변문단의 거목들, 그리고 연변대학의 박유훈, 임윤덕 교수도 살고 있었다. 특히 김철 선생은 1950년대 초반에 벌써 조선족시단에 샛별처럼 떠올랐던 시인인데 광명가 73조, 말하자면 김병기네와 같은 주민소조에서 살았다. 지금은 머리가 홀랑 벗어졌지만 30대 초반인 그때만 하더라도 하이칼라에 정장을 하고 반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예쁜 부인이 늘 그의 팔을 잡고 그림자처럼 붙어있었다. 워낙 친구를 좋아하고 성격이 호방한 김철 시인은 늘 주말도 아닌데 시인묵객들을 불러들여 술추렴을 했다. 운전수인 김병기는 초아침에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을 했다가 밤늦게 돌아오는데 김철 선생과 그의 시우들은 노들강변에 아리랑을 부르면서 술잔만 기울였다. 그 모습이 김병기네 자식들의 눈에는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요즘 말로 하면 커다란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에 다니는 김병기의 큰아들 김봉웅은 이 구실 저 구실 대고 김철 선생네 댁을 자주 드나들었다. 황차 김철 선생의 아우 김봉섭과는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철 선생네 댁은 물로 다른 작가, 시인들의 집에 가서 한 아름씩 책을 빌려오군 하였다. 또한 김병기는 큰아들이 보겠다는 책은 다 사주었으니 그때 벌써 김봉웅의 서재에는 조선에서 나온 《조선현대문학선집》과 《세계문학선집》이 씨 하나 빠지지 않고 다 꽂혀 있었다.
광주김씨 가문의 삼총사가 평생 문학을 하게 된 것은 이 “별들의 동네”에서 나서 자란 것과도 관계되겠지만 셋째인 김관웅과 넷째인 김호웅은 물론이요, 외과의사인 다섯째 김철웅, 일본어 부교수인 막내 김정웅까지 수필을 쓰고 문학논문을 쓰고 있는 데는 이 가문의 계몽스승인 김봉웅의 영향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하겠다.
김봉웅은 광주김씨 가문의 팔남매 중 장자이다. 장형여부(長兄如父)라는 말도 있지만 김봉웅과 막내 정웅은 나이 차가 무려 20년이나 된다. 그러니 김봉웅은 동생들에게는 정말 부모 같고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옛날 평양의 김명복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김봉웅은 어릴적부터 총기가 좋았다. 그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예닐곱 살 때 벌써 동네 어른들의 명함은 물론이요, 나이와 생신날까지 줄줄 외웠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의 술꾼들은 이 삼척동자에게서 정보를 알아가지고 생일상을 차린 집을 기신기신 찾아가 술 한 잔씩 얻어먹었다고 한다.
김봉웅은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하고 평생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편집원으로 일했는데 그의 놀라운 기억력과 문장력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연변의 유명한 시인 김응준은 《중국문학사》(전3권), 《중국현대문학사》, 《중국당대문학사》, 《조선고전문학사》, 《황구연전집》(전10권) 등 무게 있는 대학교 교과서들은 거의 다 김봉웅이 편집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봉웅 문우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근면하게 독서하여 연박한 지식을 소유하였다. 특히 세계의 문학, 역사, 음악 등에 대한 그의 학식은 감탄할 만 하였다. 그 많은 문학명작의 줄거리며 인물들, 주인공 뿐만 아니라 기타 인물들의 형상 및 이름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20년 전에 내가 《세계명언집》집필에 수요되는 중문 “명언대관(名言大觀)”부록에 나오는 외국명인들의 이름을 번역해줄 것을 그에게 부탁했더니 그 자리에서 사전 하나 뒤지지 않고 근 2백 명의 이름을 번역했다. 그 너부죽한 필체는 지금도 나의 책에 바래지 않고 남아있다.”
또 평론가 장정일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문학, 철학, 정치 할 것 없이 봉웅의 흥취와 독서범위는 넓었다. 기억력이 특별했던 그는 남들이 번지기 어려워하는 서양, 러시아 문학작품 작중인물들의 긴 이름도 줄줄 외웠다. 이는 작품에 대한 그의 사랑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친구들과 얘기를 할라 치면 그리스의 고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으로부터 러시아의 꾸드조프, 소련의 쥬코프와 같은 군사가들, 그리고 조선의 정계인물들에 이르기까지 막히는 데 없이 박학다식함을 보여주군 해서 그는 나를 감복시켰고 친구들도 흔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군 하였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김봉웅과 함께 흑룡강 북대황에 가서 노동단련을 했던 저명한 소설가이며 중앙민족대학 교수인 리원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봉웅 형님과 나는 그 후 세월의 풍파 속에서 북대황에서 고락을 같이 한적 있다. 낮에는 힘들게 일하고 밤에는 등잔불 밑에서 잡담하다가 곯아떨어지는 고달픈 세월에 봉웅 형님은 친히 작곡하고 구수한 이야기로 여러 조선족 대학생들에게 소중한 웃음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봉웅 형님은 청각장애가 있는데 비상한 기억력 때문인지 음률에 조예가 깊어 악기 하나 없이 멋진 곡들을 제법 척척 지어냈다. 그때는 아리랑 같은 노래도 부를 수 없는 시기였다. 그 당시 실정에 맞게 내가 쓴 가사 「실천전사의 노래」,「북대창의 노래」등에 봉웅 형님이 작곡하여 련(連)의 행사 때나 쉼터에서 불렀다. 그때 고향을 떠나 머나먼 흥안령밀림에 갇힌 만뢰적막(萬籟寂寞)의 세월, 그 노래는 큰 위로가 되었다.
북대황은 인가와 멀리 떨어져 신문은 일주일이나 늦은 구문이고 읽을 수 있는 책은 《모택동선집》뿐이었다. 따분하기 그지없는 문화생활에 우리 조선족 대학생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이야기모임’을 가졌다. 대부분 자기 주변의 이야기다보니 금시 바닥이 났다. 하지만 봉웅 형님은 마를 줄 모르는 샘물처럼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고금중외의 문학을 꿰뚫고 있는 분이니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우리는 ‘수정주의소설’이라는 혐의를 받는 작품은 될수록 피했다. 늘 모여앉아 봉웅 형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수상한지 하루는 해방군지도원이 나(당시 나는 련의 선전위원)를 불러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고 은밀히 탐문했다. 나는 중국혁명의 역사이야기를 한다고 대답했다. 조선어를 모르는 지도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경각성을 높여 문학 외의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봉웅 형님은 상상 밖으로 동물이야기를 했다. 동물들을 문(門), 류, 과까지 나누어 구체적이고 생동하게 이야기하여 의학원과 농학원 졸업생들마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봉웅이는 북대황에 올 사람이 아니라 과학원 원사로 있을 사람인데…’
봉웅 형님의 기억력과 재능은 누구나 다 긍정했다. 세월의 파란곡절로 형님은 학자는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우수한 편집으로 되었다. 나는 우수한 편집이 되려면 봉웅 형님처럼 연박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김봉웅은 동물학은 더 말할 것 없고 동서양 요리에도 박사였다. 시장에서 직접 생선이며 고기며 채소며를 구입해가지고 주방에 들어가면 맛스러운 요리를 서너 접시 순식간에 만들었다. 새로운 요리는 관련 서적을 펼쳐놓고 했는데 특히 잉어국과 낙지회는 일품이었다. 주말이면 요리 서너 가지 해놓고 동생들이나 문우들을 불러놓고 고금중외의 영웅들을 논하는 게 그의 취미요, 재미였다. 여류소설가인 리혜선씨는 김봉웅의 요리를 맛보고 나서 “한식점 하나 개장하면 광주김씨 가문이 큰 부자가 되겠네.” 하고 말했다.
김봉웅의 생전 모습, 특히 동생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것은 그의 동생 김관웅의 수필 <큰형님께서 물려준 유산>이다. 이 수필의 골자만 추려서 여기에 옮긴다.
“9월 27일 장례를 치렀던 그날 아침, 사제(司祭)를 맡은 자형이 나더러 큰형님이 평소에 쓰셨던 옷들과 소지품 외에 가장 좋아했던 책 몇 권을 고르라고 분부하셨다. 큰형님께서는 평소 즐겨 읽으셨던 책들을 하늘나라에 가지고 가시라는 뜻이다.
우리는 큰형님의 서재를 만권당(萬卷堂)이라 불렀다. 나는 책들이 빼곡한 ‘만권당’에 들어가서 큰형님이 젊은 시절에 가장 애독했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부활》과 구소련시기의 대작가 미하일 쑐로호프의 장편소설 《고요한 돈》을 골라놓았다. 큰형님이 젊은 시절 문학청년으로 문학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던 그 무렵인 지난 세기 5,60년대는 러시아, 소련문학이 중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큰형님께서는 톨스토이와 숄로호프의 문학에 심취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나이가 어려서 톨스토이와 숄로호프의 소설에 담겨있는 복잡한 스토리와 심오한 사상들을 다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형님의 구수한 이야기를 통하여 작품들의 윤곽이나 중요한 부분들에 대하여 대충 알고 있었다. 나는 나이가 들어 가만히 큰형님이 보는 《수호전》, 《삼국연의》, 《서유기》나 셰익스피어, 바이런, 발자크, 모파상, 푸시킨, 고골리, 체홉, 고리키 등 동서고금의 문학대가들의 명작들을 훔쳐서 도깨비 기왓장 번지듯이 대충 읽었다. 문화대혁명 전에 나는 이미 큰형님이 보는 책들을 적잖게 훔쳐 읽었다. 이런 책들 중에는 숄로호프의 장편소설 《고요한 돈》도 있었다. 나는 악시니아요, 그레고리요 하면서 작품 중의 인물과 사건, 재미나는 부분들을 남들에게 이야기해줄 정도로 익숙히 알고 있었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교수님들에게서 동서고금의 문학사나 문학이론 강의를 들어도 적잖은 부분은 큰형님에게서 귀 아플 정도로 들은 것이어서 생소하지 않았다.
큰 형님의 흥취는 넓었다. 특히 음악에 대한 큰형님의 흥취는 남달랐다. 악기도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오선보를 손수 초록하고 시창하면서 꾸준한 독학을 통해 악리와 동서고금의 음악사지식을 널리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늘 세계명곡을 불렀다. 우리 동생들도 큰형님을 따라서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콥스키 같은 동서고금의 많은 세계명곡이나 <피가로의 결혼>, <카르멘>, <콩쥐와 팥쥐> 등 오페라의 아리아들을 어릴 때부터 귀에 익게 들었다. 그중 적잖은 곡들은 큰형님을 따라 음정과 박자가 별로 빗나가지 않게 부를 수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언제나 낭랑한 글소리가 들렸고 팔남매 개구리합창단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동네방네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때 큰형님에게서 평소 귀동냥으로 얻어듣고 큰형님의 책들을 훔쳐보고 큰형님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이나 미술에 관한 예민한 감수성이 후에 내가 문학예술연구에 종사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에 재미나는 에피소드들이 많다.
1978년 나는 대학입시에 참가하였다. 역사시험에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정을 서술하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나는 어려움 없이 써낼 수 있었다. 그것은 큰형님이 평소 여러 번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들도 나는 평소 큰형님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에서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해 역사시험에서 길림성 조선족 입시생들 중에서 제일 높은 성적을 따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큰형님의 덕을 많이 보았다. 첫 학기에 《중국조선족문학작품선독》을 배웠다. 백호연 선생이 1950년대 초반에 발표한 단편소설 <꽃은 새 사랑 속에서>를 강의하던 중 선생님은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이 거론한 숄로호프의 장편소설《고요한 돈》에 나오는 그레고리는 ‘볼셰비키의 견강한 혁명전사의 형상’이라고 분석하였다. 나는 터무니없는 분석이라고 생각하고 휴식시간에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고요한 돈》에 나오는 그레고리는 백파와 홍군 사이에서 줄곧 방황하고 동요한 사람이 아닙니까? ‘볼셰비키의 견강한 혁명전사의 형상’이라고 하면 작품 속의 형상과는 다르잖습니까?’
나의 물음에 한동안 어정쩡해있던 선생님은 쓴 오이 보듯 곱지 않은 눈길로 나를 흘겨보았다.
‘동무가 뭘 안다고 그러오? 사람이 이렇게 교오자만하면 못 쓰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에 입학한지 한 달도 안 되는 신입생으로부터 이처럼 당돌한 질문을 받았으니 왜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는가?
후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은 그날 교학이 끝난 후 당시 연변대학에서 서양문학의 최고권위자로 계셨던 정판룡 교수님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했고 정판룡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반문하셨다고 한다.
‘그 학생이 이름이 뭐야? 그 학생의 말이 맞아. 선생인 자네가 오히려 《고요한 돈》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나는 정판룡 교수님과 첫 대면을 할 수 있었고 자신감을 얻어 본과를 졸업하고 학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석사공부를 했고 대학 교단에서 서양문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나와 《고요한 돈》을 둘러싸고 언쟁이 있었던 선생님도 후에 이 일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주하면서 대학교수로서의 아량과 진솔함을 보여주셨다.
어찌 이 뿐이랴.
1970년대 초반, 내가 훈춘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 연변군분구에서 꾸리는 《동북민병》잡지사에 편집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 모로 주선을 해주셨던 분도 큰형님이였다. 1979년, 나의 처녀작 <청명날>과 넷째 호웅이의 처녀작 <산 속에 핀 진달래>도 큰형님께서 손수 알심 들여 지도하고 수정하여 햇빛을 보게 하였다. 또 두 형제가 나란히 개혁과 개방 후 연변에서 처음으로 되는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 내가 연변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에 처녀단편소설집 《소설가의 안해》를 출간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주선해주신 분도 다름 아닌 큰형님이었다.
지금까지 나와 호웅이의 문학창작과 학문연구의 길은 바로 큰형님이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형님은 나에게 있어서 지식과 문화의 횃불로 내가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준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의 계몽스승이었다. 그 후 대학교수로 되어 지식의 바다에서 항행하는 나에게 큰형님께서 언제나 어둠을 밝혀주고 항로를 가리켜주는 등대나 나침판 같은 존재였다.”
4. 연변문단의 흑마—김관웅
김관웅의 단편적인 경력과 일화는 그 자신이 쓴 <인생과 선택>, <로싼제(老三屆)영탄곡> 과 같은 글에서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조성일 선생의 글이 볼만 하다. 2006년 8월, 저명한 평론가 조성일 선생은 <우리 문단의 흑마―김관웅 교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김관웅 교수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거친 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면서 질주하다가는 문뜩 멈춰 서서 갑자기 무엇에 노했는지 두 앞발을 건뜻 쳐들고 울부짖는 야생 흑마(黑馬)를 연상하군 한다.

흑마(黑馬)를 영어에서는 다크 호스(dark horse)라고 한다. 영어에서 다크 호스는 단순히 털빛이 검은 검정말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크 호스는 선거나 경기에 불쑥 나타난, 미처 예상치 못했던 강력한 우승후보나 선수 또는 유력한 경쟁상대를 뜻하기도 한다. 이런 영어의 뜻 빛깔이 한어에 영향을 주어 흑마(黑馬)라는 이 낱말은 영어와 비슷한 뜻 빛깔을 가지게 되었다.
1970년대 말, 김관웅 교수는 대학교 학부생 1학년 때 단편소설 <청명절>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처녀작인 이 작품이 개혁과 개방 이후 연변의 첫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5년 단편소설집 《소설가의 아내》로 문단에 호적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관웅 교수가 ‘강력한 우승후보나 선수’ 또는 ‘유력한 경쟁자’의 이미지로 내 머리 속에 각인되지는 못했다.
김관웅 교수가 진정으로 우리 문단의 흑마로 내 시야에 유표하게 들어온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였다.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학사, 석사, 박사를 거쳐 10년 이상이나 대학교에서 두문불출하고 공부에만 정진하고 있던 김관웅 교수가 소설창작에서 문학평론으로 전향하여 유망한 평론가로 갑자기 문단에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쓰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번 쓰기만 하면 문단을 놀라게 하는 그러한 평론들이 김관웅 교수의 손에서 속사포마냥 쏟아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이래 그가 내놓은 저서들과 논문 그리고 평론의 골자만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론저서들로는 《조선고대소설사고》, 《조선고전문학의 발전과 중국문학》(공저), 《중조고대소설비교연구》, 《조선문학의 이해》, 《외국문학사》(공저), 《서양문학사》(공저), 《서방모더니즘 문학사론》(공저), 《수필창작론》, 《중국조선족문학통사》(공저), 《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중국조선족문학》 등이 있고 100여 편의 학술논문과 100여 편의 중국조선족문학과 관련된 평론이 있다. 이밖에도 그는 문학창작도 게을리 하지 않아 칼럼, 수필에서도 자기의 개성과 장끼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달성한 학문적인 수준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적어도 조선문학이나 중한비교문학 등 분야에서는 중국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조선반도의 남과 북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조선―한국학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였다. 이는 중국조선족평단에서는 있어본 적이 없는 일로서 우리 노일대의 문학 이론가, 평론가들이 해내지 못한 장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학문적 수련과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김관웅 교수는 대학강단에서 서양문학, 서방모더니즘문학, 조선문학, 20세기서방문학이론, 문학이론, 비교문학, 문화학, 세계문화사, 수필창작 등 다양한 학과목을 가르치고 학사, 석사, 박사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함으로써 학문연구와 문학창작의 쌍풍수를 거두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2003년부터는 《우리동네 문학동네》라는 개인홈페지를 운영하면서 품위 있는 연설고, 강의고,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치는 글들과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칼럼과 단평들을 쏟아내어 우리 문단의 이목을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개인홈페지가 우리 문단에 준 영향은 어중간한 문학지를 능가한다.
특히 중국조선족 문학평론분야를 보면 김관웅교수의 눈부신 활약상이 가장 주목된다. 그의 평론의 가장 큰 특점은 우리 민족의 현실문제에 초점을 맞춘 그의 민족적사실주의론에서 잘 보여진다. 이밖에도 그의 문학평론은 새로운 문학비평방법론에 입각한 엄밀한 논리성과 심각하고 날카로운 사회, 문화 비판성에서 보여진다. 이를테면 <식민주의사관과 김문학현상>, <김문학의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을 평함>, <민족적 사실주의로 나아가는 우리 소설문학>, <여성과 시>, <문화혁명시기 중국여성의 애정비극과 정치> 등은 그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평론들이다. 이에 대해 북경대학 박충록 교수는 90년대의 중국조선족의 문학평론을 논하면서 김관웅 교수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평론가 김관웅은 학자형의 평론가로 그의 장끼는 비교문학평론이다. 그는 근년에 새별처럼 평단에 등장하여 맹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문학의 여러 장르에 다 장끼가 있는데, 평론에서도 다방면의 시각으로 문학을 논하는 인기평론가로 부상하였다. 그의 평론이 돋보이는 점은 그가 동서방의 문학에 정통하고 마르크스주의문예학, 유럽의 예술수법을 잘 알고 있으며 조선문학에도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 이론전개가 논리적이고 설복력이 강하다… 김관웅은 동서방문학에 정통한 학자형 평론가로 우리 문단의 작가들의 창작을 잘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망한 평론가이다. 평단은 그에게 기대하는바가 크다.”
박충록 교수의 평가처럼 김관웅 교수는 동서고금의 문학사와 문학이론에 대해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역사, 문화 등 문학 밖의 기타 문화 분야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그릇이 큰 학문적 스케일과 합리한 지식구조를 가진 김관웅 교수는 50년대에 대학공부를 한 우리 같은 기성세대문인들에 비하면 분명히 우세를 갖고 있다. 김관웅 교수는 흑마마냥 선배평론가들의 유력한 경쟁자로 나타났다. 청출어람이승어람(靑出於藍而勝於藍)이라고, 후에 난 뿔이 우뚝한 법이다. 나는 우리 평단에 김관웅 교수 같은 유망한 신진평론가가 나타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김관웅 교수에게는 탄탄한 학문적인 준비만이 아니라 천생적인 평론가의 기질도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수한 평론가는 작품을 분석하고 그 진가를 독자들에게 알려줄 뿐만 아니라 불의에 도전하는 영원한 ‘도전자’이고 ‘시비꾼’이여야 한다. 한 사람이 평론가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감상능력의 수준 여하에 달릴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시비 가르기를 좋아하고 변별력이 강한가 약한가에도 달린다. 극히 이지(理智)적인 소크라테스로부터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니체에 이르기까지 무릇 대평론가들은 모두 불의에 도전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쟁투적인 비평을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마디로 평론가들은 세상만사에 대하여 시비 가르기를 좋아하는 ‘시비꾼’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스페인 투우장의 투우 같이 용감하게 뜨고 박는 기질을 가져야 한다. 김관웅 교수는 천성적으로 이런 투우같이 용감하게 뜨고 박는 저돌적인 성향과 기질을 갖고 있다.
김관웅 교수는 성미가 급하다. 그는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는 성미를 갖고 있다. 그는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않는다.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 못한다.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은 워낙 시비를 마음속에 두고 겉으로 관용을 내비쳐야 하는 법이지만, 그는 성격적으로 관청에서 벼슬을 하는 것보다는 글방에서 선비노릇을 하는 게 적성에 더 맞는 것 같다. 김관웅 교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고야마는 성격을 가졌다. 설사 상대가 선생이든, 선배이든, 친구이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정계의 요인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김관웅 교수의 사전에는 숫제 ‘거짓’이나 ‘아첨’ 같은 단어가 없다. 그는 학문적 견해나 정치적 견해를 그때그때의 시류에 따라 수정하거나 바꾸는, 바람 따라 돛 다는 그러한 속물근성이 가득한 평론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대 바른 성격의 소유자이다.
김관웅 교수는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다보니 최근 몇 년 동안만 해도 다섯 번이나 필화를 당했다. ‘입덕’을 많이 입은 셈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조화보다는 쟁투가 더 많은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 쟁투가 번번이 그의 옳음과 대방의 그름으로 인해 벌어진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그가 옳았다. 김문학씨와 김관웅 교수 사이의 오랜 논쟁과정에서 그는 처음에는 문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고 많은 불이익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완전히 옳은 것으로 판정이 났다.
이처럼 김관웅 교수는 쟁투로 점철된 문단생활을 하다 보니 많은 동지를 규합하게 된 동시에 또 많은 적을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되였다. 한마디로 그는 애증이 분명하고, 옳고 그름은 분명히 밝히려고 한다. 그는 사랑과 증오,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거나 중용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미우면 밉고 고우면 곱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다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에누리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객관의 평가도 아주 양극적이다. 그래서 김관웅 교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겉보기에는 터프해도 사귀여보면 다정다감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와 함께 ‘잘난체하는 놈’이요, ‘뜨개소’요, ‘괴짜’요 하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사리를 볼 때 동양인들, 이를테면 우리 조선족은 객관적, 이성적인 논리구조에 따라 사물을 보는 서구인에 반하여 주관적, 감성적으로 사물을 보려는 극단적인 심리구조를 갖고 있다. 예컨대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는 생전에 악처에게 늘 시달렸다. 톨스토이 자신은 물론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은폐하는 법 없이 공개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그런 사실이 주관적 사고를 하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큰 착오로 여겨져 말썽이 자자하기 마련이지만 객관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들은 톨스토이의 이미지에 루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조선족은 사리를 봄에 있어서 훌륭하면 모두가 훌륭해야 하고 한 가지 흠집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극단논리에 사로잡히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심리구조에서 헤어 나와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의 공(功)과 과(過)를 객관적으로 전면적으로 평가함과 아울러 그의 과로 공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요즘 우리 평단의 어떤 평론가들은 온통 중간에서 시비를 캐는 것을 말리고 남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찬송가만 부르고 만세삼창만 외치고 있다. 심지어 자기를 욕하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욕해도 비평은커녕 맞장구를 치면서 잘한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또 어떤 평론가들은 오늘날의 상업주의에 물젖어 돈이나 생기고 이득이나 생기면 달갑게 거짓말을 하고 칭찬을 한다. 이런 뼈대가 없는 평론가, 시류를 따르는 바람잡이평론가, 상황에 따라 향배(向背)를 달리하는 눈치보기평론가들이 번성하는 이 문단에서 문학은 일정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고 있다. 문학창작에 대한 감시와 감독의 기능을 잃고 있다.
이런 지조 없고 주체성이 없는 문인들이 있는 문단에서 좌충우돌하며 불의와 싸우는 흑마 같은 김관웅 교수가 있다는 것은 우리 문단의 자랑이고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김관웅 교수의 인격적 매력은 바로 그 저돌성과 쟁투성에 있고,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그 의로움에 있다고 본다. 비록 이러한 저돌성과 쟁투성이 앞으로도 그에게 많은 불이익을 가져다줄 소지는 많지만 그렇다고 그 모난 것을 다 죽이고 점잖은 젠틀맨이 되고자 한다면 그때는 김관웅 교수가 자기의 본질을 잃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김관웅 교수가 김관웅 교수로 되지 않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는 하지만 모난 돌이야말로 좋은 돌이다. 우리 문단의 흑마― 김관웅 교수가 앞으로도 그 날카로운 모를 죽이지 말고, 그 강인한 초지(初志)를 굽히지 말고 계속 용왕매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시에 문단쟁명에서 경우에 따라 자제도 하고 수단과 방법에도 유의하고 표현의 강약완급에도 신경을 쓰길 바란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야 비판적 사실주의문학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고 러시아문학의 발전방향을 리드한 벨린스키처럼 김관웅 교수가 중국조선족문학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대비평가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5. 연변문단의 백마—김호웅
김호웅의 단편적인 경력과 일화는 그 자신이 쓴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와 같은 글에서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조성일 선생의 글이 볼만 하다. 2007년 12월, 조성일 선생은 <우리 문단의 백마 ― 김호웅씨>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필자는 관웅씨를 지칠 줄 모르고 불의에 맞서 용감하고 저돌적으로 싸우는 사나이의 기질을 감안하여 흑마로 비유한적 있다. 그의 아우 호웅씨는 지칠 줄 모른 견인성에서는 형과 비슷하나 유연성과 포용력이 형보다 돋보인다. 그래서 나는 200근에 육박하는 웅장한 체구를 가진 호웅씨를 백마에 비기고 싶다. 잘 생기고, 인품 좋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또 연변의 마당발로 소문난 팔방미인이다. 강의를 잘하고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해서 대학교수로도 인기가 만점이다. 그는 또한 우리 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새롭고 괄목할만한 창의적인 비평성과를 이룩한 우리 문단의 중견으로서 우리 비평계의 앞자리에 좌단(左袒)하고 있는 이름 있는 비평가요, 현대지성이다.”
여기서는 문학비평가, 현대지성으로서의 김호웅의 어제와 오늘을 알아보고자 한다.
1) 먹을 건 없어도 삶은 풍성해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광주김씨 가문의 넷째아들인 김호웅 역시 보통 운전기사의 가정에서 나서 자랐지만 그 대신 후덕하고 문예와 학문을 숭상하는 가정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김호웅의 아버지는 한평생 운전기사와 자동차 정비사로 일해 온 순수한 노동자이다. 이 어른신은 90세까지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장을 보고 연길 주변을 돌면서 드라이브를 하셨다. 아버님은 신문이나 책도 보지만 방송 듣기를 더 좋아했다. 서울방송은 물론, 일본어도 섬나라 사람들을 뺨 칠 정도로 잘해서 NHK방송도 가끔 들었다.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손금 보듯 하고 대학교수인 자식들과 시사(時事), 정치문제를 두고 쟁론을 벌이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김호웅의 어머니는 워낙 화투를 놀았는데, 워낙 총기가 좋은 분이라 이른 고개를 넘어서 마작을 배웠다. 그는 동네의 노인오락실에 기신기신 찾아오는 오육십 대 중늙은이들을 번마다 여지없이 눌러놓고 그 양반들의 푼돈을 낭중취물 격으로 싹쓸이를 하니까 곱지 않은 눈길로 보더란다. 그래서 워낙 소설보기를 좋아하는 분이라 공연히 미움을 받는 노인오락실에는 나가지 않고 집에서 돋보기를 끼고 자식들이 가져다주는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같은 잡지를 보는 게 큰 재미였다고 한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초년에 어버이를 잃고 거친 만주벌판을 외롭게 떠돌다가 만난 사이인지라 자식욕심도 많아 팔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에 범 같은 아들만 일곱이다. 이들 형제들이 자랄 때, 부모로서는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게 제일 큰 아픔이고 걱정거리였다. 가을철이면 부모님을 따라 온 집안 형제들이 산에 들에 떨쳐 나가 이삭을 줍고 배추나 무 잎사귀 따위들을 주워 들였다. 그래서 겨우내 콩죽에 수수밥을 먹었는데 밥만은 맘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 “비지”라고 하는 콩죽만은 맘대로 먹을 수 있었다. 이들 형제가 다 소 같이 든든한 건 아마도 콩죽 덕이 아닌가 한다.
김호웅은 1976년 봄, 3년 동안의 군복무생활을 마치고 연길에 돌아와 생각 밖으로 연변인민출판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정규 대학생들을 배출하지 못했던 당시 사정과도 관련이 되겠지만, 군복무를 하던 3년 동안 날마다 꼬박꼬박 써둔 일기가 은을 냈던 것이다. 일기와 함께 별로 보잘 것 없는 짐짝을 먼저 집에 우편으로 부치고 귀향하는 기차를 탔는데, 그 짐짝을 헤쳐 본 부모님과 형들이 호웅의 일기를 돌려가며 보다가 모두가 포복절도했다는 것이다. 술에 취해 취사반의 밀차에 실려 온 일, 전투훈련 시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백성들의 사과를 따 먹고 땅콩을 파먹던 일, 모두 재미가 있다고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사과는 나뭇가지에 달리 대로 빙 돌아가며 떼어먹으면 그 자리에서 말라버려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땅콩은 슬쩍 파서 까먹고 껍질은 다시 묻어두면 쥐도 새도 모르게 배릿하고 고소한 땅콩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맏형인 김봉웅은 웃다 말고 부모님을 보고
“넷째가 글재간이 있군요. 출판사에 취직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하고 의논을 드리는데 아버님은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랬다구, 넷째가 소학교두 나오나 마나 했는데 책을 만들 수 있겠어?”
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데 어머님은
“한림학사도 하루아침에 되는 법이 있겠어요? 다 배워서 되는 거지요. 넷째가 머리 하나는 좋으니까 부지런히 배우면 제 큰형처럼 편집 노릇 하나는 제대로 할 거예요.”
하고 큰아들을 다시 보고
“한 번 잘 주선해 봐요, 동생 일이니까.”
했다. 이래서 김호웅은 큰형이 주선해준 덕분에 연변인민출판사 인사과로 찾아가게 되었다. 워낙 잘 생기고 푸접 좋은 젊은이라 면접에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되어 그야말로 누운 소 타기로 출판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아동편집실과 문예편집실 둘 중에서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하는 것을, 김호웅은 ‘귀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라고 했거늘’ 하고 문예편집실에 들어갔다. 거기서 밤낮 고참 편집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그들이 손 본 원고를 필기하고 정선을 하는 일이나 했지만, 참으로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명언이지만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고 그 무렵 그가 모시고 일했던 고참 편집들 하나하나가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번역가였다. 소설가 허해룡과 김길련 선생, 시인 김성휘와 김태갑 선생, 번역가 남상현과 최유훈, 강범구, 박정일 선생과 같은 이들이 막강한 편집진을 구성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고참 편집들의 그늘 밑에서 김호웅은 차차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하지만 필경 엎어놓은 못 그릇 같은 고참 편집들의 원고를 필기하고 정선하는 일을 그냥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기실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그는 독자적으로 책 하나를 편집하기에는 힘에 부치었다. 배우지 않거나 학문이 없으면 마치 담장을 향해 있는 것과 같다(不學面墻)는 것을 피부로 절감하였다. 바로 그 무렵 대학교 입시제도가 회복되었고 두 번 도전을 해서 1978년 9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2)문학작품도 하나의 생명체
대학공부를 하는 데는 소년시절에 본 고금중외의 명작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대학에서는 문학사 담당 교수들마다 백년, 천년을 주름잡으면서 여러 나라 문학사를 얼음에 박 밀듯이 강의하는 판이라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머리가 좋은 친구라 해도 그 많은 명작들을 일일이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호웅은 셰익스피어를 강의해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고 빅토르 위고의 《비참한 세계》를 강의해도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는 비로소 부모님과 큰형님이 고마운 줄 알게 되었다.
대학 1학년 습작학 시간에 발표한 <산속에 핀 진달래> 라는 소설은 최상철 교수의 추천으로 《연변문예》에 실리게 되었다. 김호웅은 신바람이 나서 방학이면 소설을 쓰느라 진땀을 빼기기도 했다. 방학마다 한두 편씩 쓴 게 10여 편 잘 되었고 제법 소설가로 두각을 나타낼 법 했다.
하지만 대학 본과를 나오자 바람으로 석사과정을 밟게 되고 이어 대학교 강사로 취직을 하다 보니 소설과는 담을 쌓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부교수, 교수라는 학문의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자면 부지런히 논문을 써야 했다. 학사학위논문은 풍자문학의 일반 이론에 관해 썼고 석사학위논문은 조선왕조 판소리계소설에 관해 썼다. 하지만 기존 연구 성과들을 두루 짜깁기를 해서 만든 논문이라 그 자신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학술연구라는 것을 처음 해보기는 1988년 임범송, 권철 교수의 주도 하에《중국조선족작가작품연구》라는 공동 프로젝트를 작가 별로 떼어 가질 때다. 김택영, 신정, 신채호, 김창걸, 김학철, 리근전… 등 수십 명 작가들을 각자가 한두 명씩 맡아가지고 연구하기로 했는데 김호웅은 김학철 선생의 문학에 매료되어 원로 교수들의 눈치를 보다 말고
“저는 김학철 선생의 문학을 다루고 싶습니다.”
했더니 원로교수들 모두가 벙긋벙긋 마주보더니 생각 밖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김학철 선생은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 다루기를 저어했던 작가였는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김호웅이 덥석 물어간 것이다.
호랑이나 사자도 큰 짐승을 쓸어 눕혀야 여러 날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연구자도 연구대상을 큰 걸 잡아야 평생 녹여먹을 수 있다. 세계에는 셰익스피어로 밥을 먹는 자가 무려 몇 천 명이 되고 중국에는 홍학(紅學), 즉 《홍루몽》으로 밥을 먹는 자가 몇 백 명은 실히 되는 것도 같은 도리다. 김학철 문학과의 만남은 김호웅에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다. 그분의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을 배울 수 있었고 그분의 넉넉한 배포와 유머를 배울 수 있었다. 김호웅은 <조선의영군 항일투쟁의 예술적 기념비>, <김학철론>을 비롯해 7-8편의 인물평과 논문을 쓸 수 있었고 2007년에 마침내 김해양 선생과 함께 《김학철평전》을 펴낼 수 있었다. 김호웅은 1989년 <김학철론>을 통해 처음으로 김학철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도하였고 그 후에도 김학철의 삶과 문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지속적으로 거듭하면서 수많은 논문과 평론들을 통하여 김학철문학에 대한 독창적인 지론을 펴냈는바 그는 김학철문학 연구의 본격적인 진전(進展)에 큰 기여를 한 문학비평가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펴낸 《김학철평전》은 처음으로 되는 김학철평전으로서 문필이 유려하고 내용이 풍만하고 자료가 풍부하다. 앞으로 김학철문학에 대한 작가론적 연구에 많은 계시를 주게 될 역작이라 하겠다.
김호웅은 정판룡 교수의 문하에서 1998년 《재만조선인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동안 일본 와세다대학에 1년 반, 한국 한양대학교와 배재대학교, 한국국제교류재단에 각각 1년 간 객원교수로 가 있으면서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와 동훈(董勳) 선생의 신세를 많이 졌다. 오무라 교수에게서는 학자의 근면성과 치밀함을, 동훈 선생에게서는 따뜻한 인간애와 폭넓은 정치적 안목을 배웠다. 특히 정판룡 교수 문하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그분의 예지와 지혜, 넓은 흉금과 깊은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김호웅은 그 동안 만난 아름다운 인간들의 일화를 엮어 <불굴의 투혼 김학철>, <민중의 벗 정판룡 교수>, <북청물장수 동훈 선생>, <오오무라 선생>, <한그루 무궁화>, <지성의 덕목>과 같은 글들도 발표했다. 그 중 <불굴의 투혼 김학철>, <한 그루 무궁화>, <일본인의 정교한 미소와 서비스정신>은 중학교 조선어문 교과서와 독본에 실리기도 했다.
김호웅은 모든 생명체가 구조가 있듯이 하나의 문학작품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낱말 하나도 적재적소에 놓지 않으면 가시든 살점처럼 문장이 병들고 아파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도끼가 제 자루를 찍지 못하고 스님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하듯이 문학도 본질적으로 원관념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보조관념으로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본질적으로 메타포(비유, 은유, 상징)이며 좋은 작품은 그 나름의 정교한 기법과 장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비밀을 밝히려면 자연 문학이론을 깊이 공부해야 하고 시, 소설, 수필 등 여러 장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요령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기에 김호웅의 평론들을 보면 언제나 참신한 이론적 패러다임으로, 거시적 시각과 미시적 시각을 결합해 텍스트에 꼼꼼하게 접근하고 있고 작품의 구조와 기법 및 장치에 대한 깊은 해석을 시도한다. 또한 그의 글은 이론적 깊이가 있고 논리정연하면서도 미학적인 울림이 있는 유연한 스타일을 갖고 있어 마치 도토리묵에 동동주처럼 시원하고 구수해 읽기에 편하다.
김호웅의 문학비평은 무겁고도 관념적이고 경직된 그런 따위의 글이 아니다. 그의 문학비평은 이론이 안받침이 된 형상적이고도 감성적인 비평 스타일을 이룩해가고 있다. 그의 글은 난삽하거나 현학적이거나 까다롭지 않다. 자기도 모르는 엉뚱한 개념과 술어의 남발이거나 외피적인 장식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문학비평의 글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번뜩이는 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일언이폐지하면 유중유강(柔中有剛) 의 독특한 풍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대학교수의 명색에 맞아야 해
세상이 열두 번 변해도 대학은 진리의 탐구, 인재의 양성, 사회봉사를 3대 기본 이념과 기능으로 삼는다. 이 이념과 기능을 실천하는 자가 바로 대학 교수이다. 아무리 변두리에 있어도, 아무리 교수청사가 허름해도 목숨을 걸고 진리를 탐구하고 혼신을 불살라 후학을 키우고 갈고 닦은 지식과 학문을 가지고 지역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교수만 있다면 그러한 대학은 가히 명문대학이라 할 수 있다.
김호웅은 연변대학교의 정직한 교수로서, 학문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며 대학교 교수는 정치권력과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경계하고 그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기에 그는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호인형의 사내지만 절대로 권력자의 문전에 얼쩡거리지 않으며 아무리 문단의 원로요, 실세라 하더라도 눈 감고 아웅 하는 격으로 만세평론은 하지 않는다. 그는 칼 차지 않은 무사를 무사라고 할 수 없듯이 공정성을 잃은 비평가를 진정한 비평가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비평작업에서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다. 그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부장으로서, 적잖은 문인들이 허울 좋은 개살구 같은 김문학씨를 희대(稀代)의 문화학자로 입에 침이 마르게 추어올릴 때도 “No” 하고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와 함께 “김문학 현상과 문화연구의 시각과 방법론 학술회의”를 개최했고, 일부 평론가들이 신중한 고증도 없이 저항적인 문인들을 친일문인으로 몰아붙일 때도 역시 “No” 하고 <대일 협력과 저항의 몇 가지 양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호웅씨는 포용력이 있지만 원리원칙에는 한 치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 실로 그는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강유겸전(剛柔兼全)의 지성이요, 현대 문학비평가이다.
김호웅은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과를 국가급 중점학과로 육성한 주역의 한 사람이다. 그는 강의도 잘하지만 학생들의 서클활동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다. 중국의 유명한 교육가 도행지(陶行知)는 전제정치는 순민(順民)을 요구하고 공화정치는 공민(公民)을 요구한다고 했는데, 김호웅 역시 학생서클은 학생들의 독립적 인격 함양, 자치능력의 함양에 유조하다고 생각하며 설사 자그마한 학생서클이지만 바로 여기서 세계적인 문학가, 교육가, 정치가들이 나온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일찍 조문학부 당총지서기(1991-1993)와 학부장(1996-2002) 으로 있었던 시절에는 물론이요, 평교수로 있는 지금도 연변대학 종소리문학사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학생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서 유익한 활동을 하도록 적당한 조언만 줄뿐 절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강의 중에도 좋고 학생 백일장 심사 중에도 좋고 일단 싹수가 있는 작품을 보면 알뜰하게 지도하고 다듬어서 문단지에 추천을 한다. 호웅씨의 지도하에 서옥란, 강걸, 김훈겸, 이범수, 최미성, 서채화, 김호, 윤설 등 학생이 차례로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호웅은 글만 읽고 쓰고 세상일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서재(書齋)비평가가 아니다. 그는 사회실천에 투신하고 우리 문단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자형, 실천형 비평가이다. 그는 연변문단의 활성화를 위해 묵묵히 뒤에서 수많은 좋은 일을 하였다. 그 단적인 사례를 두어 가지만 들어본다. 2005년 조선의용군의 수많은 투사들이 피 흘려 싸웠던 태항산기슭에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비를 세우기 위해 2000만원의 한화를 인입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또 2007년 《문학과 예술》지의 자금난을 해결하고자 근 2000만원의 한화를 인입하는 데도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는 대학이라는 상아탑 속에 옹크리고 앉아 소위 학문만 연구하는 학자를 보면 눈살을 찌푸린다. 새가 좌우의 두 날개로 날듯이 건전한 사회는 국가기관과 시민사회가 서로 팽팽한 긴장과 조화로운 공조(共助)를 이루어야 발전할 수 있고 대학 교수, 특히 인문학을 전공한 교수는 시민사회의 주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 기러기장학금, 철기장학금, 정수장학금등을 유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한국 조선대학교와 함께 10여 차의 청송컵 글짓기 경연을 했고 한국 흥사단과 10차의 중한청소년친선문화제를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장학금을 유치하고 학교 건물을 짓기도 했다. 청소년문화교류를 하고 시민운동을 하자면 자금이 문제인데 호웅씨가 중한청소년친선문화제와 같은 대형행사를 10년 이상 지속시킬 수 있는 데는 별다른 묘방이 없다. 행사에 최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오직 정직성과 신뢰, 열정으로 임할 뿐이다. 국내외 독지가들이 협찬할 경우, 기대치의 두 배, 세 배로 행사를 잘 치르는 길밖에 없다. 정직성과 신뢰만 쌓으면 돈은 스스로 굴러들어오는 법이다.
6. 나가며
이 글의 주인공들의 부모인 김병기, 리영순 노인은 각각 96세, 89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런데 김봉웅은 대장암으로 66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모님께서 구십 고령을 넘기셨으니 자기 자신도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믿고 건강에 너무 소홀했던 것이다. 2009년 9월 10일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출근하였는데 9월 25일 정오에 점심식사까지 하고 갑자기 심장이 고동을 멈추는 바람에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했다. 죽음이 신은 너무나도 무정했다. 동생들은 죽음의 신에게 끌려가는 큰형님을 부둥켜안고 끝없이 통곡했다.
김관웅, 김호웅은 이순의 나이를 넘었으나 여전히 노익장의 정열로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김관웅은 연변대학교에서 정년을 했지만 현재 장춘 화교대학교 등에서 여전히 강의하고 있고 국가프로젝트 《중국조선족문학통사》(중문)를 완수하고 새로운 과제를 준비하고 있다. 김호웅 역시 국가프로젝트 《당대 조선족문학의 민족적 정체성 연구》의 완성단계에 있다.
이들 둘이 존경하는 조선족문학의 대부 ― 김학철 선생은 65세에 다시 붓을 잡고 85세에 작고하기까지 “김학철문학”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연변의 대표적인 김학철 연구자인 이들 두 형제는 김학철 선생을 본받아 큰형인 김봉웅의 몫까지 다해서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학자에게는 정년이 없기 때문이란다.
주요저술목록
金柄珉, 金寬雄,『朝鮮文學的發展與中國文學』, 延邊大學出版社,1994.
김관웅, 김호웅,『동서방비교문화의 향연』,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5.
김관웅,『한국고소설사고』, 연변대학출판사,1998.
김호웅,『재만조선인문학연구』, 한국 국학자료원, 1998.
김봉웅,『작가의 사상과 사유』, 연변인민출판사, 1999.
김호웅,『문학비평방법론』, 료녕민족출판사, 2002.
김호웅,『인생과 문학의 진실을 찾아서』, 료녕민족출판사, 2003.
김호웅,『중일한문화산책』,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5.
김관웅,『중조고대시가비교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5.
김호웅, 김해양,『김학철평전』, 한국 실천문학사, 2007.
김호웅,『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 재외동포재단, 2008.
김관웅,『중조고소설비교연구』, 연변대학출판사, 2009.
김호웅,『문학개론』, 연변대학출판사, 2009.
김관웅, 김호웅,『김학철문학과의 대화』, 연변인민출판사, 2009.
김호웅,『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한국학술정보, 2009.
김호웅, 조성일, 조성일,『중국조선족문학통사』(상, 중, 하), 연변인민출판사, 2011.
김관웅, 『력사의 강 두만강은 말한다』(1,2,3), 연변인민출판사, 2012.
金虎雄,『來華朝鮮人離散文學硏究』, 연변대학출판사, 2012.
김관웅,『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중국조선족문학』(1-4), 연변인민출판사, 2014.
김호웅,『디아스포라의 시학』, 연변인민출판사, 2014.
金宽雄,『韩国古代汉文小说史略』,北京大学出版社,2015.
김호웅, 강옥설, 김순녀, 『중국조선족연구문헌자료색인: 조선족문학평론』, 연변대학출판사, 2015.
-김정영, <연변문단의 삼총사>,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변대학교 민족연구원: <연변학의 선구자들>(제2집), 한국:소명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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