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로,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타령·소리·창극 등으로 불렀는데, ‘판소리’가 지시하는 연행 장르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가 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판’은 ‘씨름판, 놀이판’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란 뜻과 함께 ‘씨름, 놀이’와 같이 특정한 행위가 일어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 성악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노래’와 ‘소리’를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가곡이나 시조·잡가 등은 노래라 하고, 소리는 판소리만을 한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노래’는 내용이 비교적 단순한 서정시를 성악으로 표현한 것이고, ‘소리’는 문학적인 면에서 그 내용이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성악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춘향가나 심청가 등의 일부만을 따로 떼어 부르는 ‘토막소리’나 목을 풀기 위하여 부르는 ‘단가’ 등도 모두 판소리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판소리는 일관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고수의 반주에 맞추어 청중 앞에서 성악으로 공연하는 예술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판소리는 사설과 연창자, 고수, 청중과 무대로 구성된다.
사설은 연창자가 청중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말하는데, 대체로 세속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설은 사건의 전개를 서술한 부분과 한 장면의 정지된 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대개의 경우 앞의 것은 아니리로 실현되고, 뒤의 것은 창(唱)으로 실현된다. 일상적 언어 형태인 아니리는 연창자의 자의에 의하여 연출되지만 창의 경우는 장단과 창조가 규격화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 장단과 창조의 선택에 따라 각 유파의 성격이 규정된다. 장단은 고수가 담당하는데, 창을 받쳐주고 포용하며 이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장단은 판소리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 장단은 대체로 진양조장단, 중모리장단, 중중모리장단, 자진모리장단, 휘모리장단, 엇머리장단의 여섯 가지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창조는 선법(旋法)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본적인 것으로 우조(羽調)·평조(平調)·계면조(界面調)가 있다.
이 창조는 판소리 유파를 구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즉 계면을 위주로 하는가, 우조를 위주로 하여 판을 짜는가에 따라 서편제 또는 동편제의 분화가 나타나게 된다. 판소리 사설의 사건은 첨예화되고, 과장된 것이 대부분이다. 비극적 상황이 있을 때는 그 전개와 관계없이 비극적인 요소를 모두 끌어들인다. 그리고 행복에 이르러서는 그 행복감을 저해할 수 있는 요소를 아무런 복선 없이 제거하기도 한다. 이를 판소리 사설의 ‘장면의 극대화’ 현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모든 인간 문화가 가지는 일반적인 속성이지만, 특히 판소리 사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는 연창자를 통하여 그가 구성하는 허구의 세계를 청중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연창자이다.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연창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신재효는 인물치레·사설치레·득음·너름새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판의 현장에서 이들은 오직 한 사람의 배우인 연창자를 통해서만 모방·재현된다.
연창자는 스스로 춘향이 되고, 월매가 되고, 이 도령이 되어 청중에게 작품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인 다역(一人多役)의 역할 때문에 연창자는 장단의 교체, 창과 아니리의 교체, 창조의 교체 등 여러 장치를 통하여 청중이 빠질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한다. 고수의 기본적인 기능은 반주이다. 따라서 유능한 반주자가 되기 위하여 고수는 수많은 연창자와 직접 대면하고 그 연창자들의 다양한 소리에 조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고수는 연창자의 상대역이나 진실한 청중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연창자는 대화의 장면에서 항상 고수를 바라보고 소리를 하는데, 이 경우 연창자는 고수를 그 대화의 상대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청중의 호응 없는 판소리 현장은 살아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청중의 호응을 유도하고, 또 이를 연창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존재가 바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청중은 무대를 구성하며, 연창자와 고수가 이루어내는 예술 행위를 감상한다. 그들은 일정한 의도를 지니고 공연장에 집결한다는 점에서 무의도적인 군중과 구별된다. 그들은 바로 공연의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는 연창자의 연창 능력과 함께 청중의 판소리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하다.
청중은 판소리의 예술화에 대한 인식의 준비를 갖추었거나, 최소한 그 행위에 대한 심정적 동의의 상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청중은 연창자의 예술 행위에 대하여 공감하지만, 동시에 그 작품의 완성에 관여하여 작품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연창자는 항상 청중의 미세한 반응까지도 점검하고, 그것을 작품의 완성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중의 이러한 참여와 호응은 연창자의 예술적 행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청중의 참여가 절제되고 있는 것은 무대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판소리의 무대는 평면 위에 돗자리나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연창자와 고수가 위치하며, 이를 둘러싸고 반원형이나 타원형으로 청중이 마주하는 단출한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연창자와 고수는 결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청중 또한 그 예술에의 참여를 위해 상대의 구획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성되어 있는 판소리가 언제 나타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존재의 성립은 사회적 배경이나 환경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소리의 발생과 전개는 그것이 이루어진 사회 문화적 현상과의 연관 속에서 그 편린을 이해하는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판소리의 발생에 관하여는 서사무가 기원설, 독서성 기원설, 강창 기원설, 광대소학지희 기원설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판소리 공연자들이 남도의 서사무가 전승 집단과 일치하며,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신성성을 기반으로 한 남도의 서사무가가 세속화 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사무가를 바탕으로 판소리가 나타나는 과정에 창우 집단의 광대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판소리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보다 활발해졌다. 대체로 숙종~영조 무렵에는 이미 우리가 인식하는 판소리의 모습이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판소리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영조 때 유진한(柳振漢)이 쓴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진한은 1753년부터 1754년까지 호남지방을 여행하면서 보았던 춘향가의 가사를 한시로 옮겨 놓았는데, 이를 흔히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라고 부른다. 이로 보면 17세기 말에는 민중들을 중심으로 판소리가 연행되고 있었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중인이나 양반층이 그 향유층에 참여하면서 국민적인 예술로 성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곡의 창법이 보급되어 유행함에 따라 영조·정조 연간에는 하한담(河漢潭)·최선달(崔先達)·우춘대(禹春大) 등이 나와 판소리의 기틀을 잡았고, 순조 이후에는 권삼득(權三得)을 비롯한 고수관(高壽寬)·송흥록(宋興祿)·염계달(廉季達)·모흥갑(牟興甲)·신만엽(申萬葉)·박유전(朴裕全)·김제철(金濟哲) 등 이른바 판소리 팔명창이 등장하여 판소리의 예술화를 촉진시킴으로써 판소리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남도의 무가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판소리는 전성시대에 이르러 그 단순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선율을 개발하면서 차원 높은 예술로 발돋움하였다.
각 지역의 음악과 전통적인 음악 기법의 수용을 통하여 판소리는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는 국민 예술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또 판소리 자체의 음악 문법이 개발되어 기존의 민속 음악과는 그 차원을 달리 하였는데, 그 중심에 놓이는 인물이 송흥록과 박유전이다. 송흥록은 기존의 판소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다른 방식의 동편제(東便制) 판소리를 창시하였고, 박유전은 서민적인 감성에 충실한 서편제(西便制) 소리를 완성함으로써 판소리는 더욱 다양해지고, 흥행에서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판소리 향유는 양반들이 갖추어야 할 교양물로 정착되었는데, 양반의 참여와 평가 기준의 구체적 표현으로 거론할 수 있는 인물이 신재효이다. 그는 지방 의 향리로 있으면서 판소리가 대립되는 계층이나 사고를 포용할 수 있도록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였다. 판소리는 본래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옹고집타령(壅固執打令)>, <장끼타령>, <왈짜타령>, <가짜신선타령>의 열두 작품이 있었다. 한편 정노식(鄭魯湜)은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서 왈짜타령과 가짜신선타령 대신에 <무숙이타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을 넣었다. 그런데 신재효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골라 그 사설을 개작하였다. 현재는 변강쇠가를 제외한 다섯 작품만이 연창되고 있는데, 변강쇠가는 그의 개작을 통하여 사설의 전모가 남을 수 있었다.
신재효는 또한 여성을 판소리의 무대에 등장시켰다. 당시까지도 판소리는 남자들만이 담당하였는데 신재효는 진채선(陳彩仙), 허금파(許錦波)와 같은 여성을 교육·등장시킴으로써 판소리사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던 것이다. 여성이 판소리 연창자로 참여하면서 음악적 세련화와 기교의 중시, 실내악적 분위기로의 변화가 가속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반의 참여, 여성의 참여는 박유전에 의하여 더욱 확고하게 이루어진다. 박유전은 서편제를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그의 호나 거주지를 고려하여 ‘강산제’로 좁혀 말하기도 한다), 이는 송흥록의 동편제가 갖는 직선적이고 고풍스러운 면에 그 이전의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여성적 성격을 가미한 것이다. 흔히 보성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 의하여 다양한 장단이 판소리에 수용되고, 또 서편제의 여성적 성격이 동편제에 가미됨에 따라 연극적인 요소인 너름새가 판소리에 보다 풍부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 음악만의 발전에 의하여 실내악적인 분위기의 산조가 나타난 것도 이 시대에 나타난 현상이다. 말없는 판소리라 불리는 산조는 청중의 참여가 배제된 채 연주자의 기교만으로 판이 이루어지는, 판소리의 음악을 향한 극단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음악으로의 극단적 표현인 산조처럼 사설만으로 독립된 판소리계 소설이 나타난 것도 이 시대의 일이다. 판소리 사설의 영향을 받아 판소리계 소설이 나타남에 따라 한국 소설은 작자나 향유층, 배경과 작품의 지향 등에 있어 폭넓은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판소리는 연창자와 고수만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형태와 배역을 나누어 창하는 ‘창극’ 형태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어졌다. 판소리가 가지는 연극적 성격을 바탕으로 창극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 계층의 형성, 창극의 배역을 맡아 분창할 수 있는 인원 확보와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의 성립, 그리고 당시에 유행한 청나라 연극의 영향 때문이었다. 최초의 국립 극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협률사가 1902년에 설립된 것도 창극이 나타날 수 있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국권의 상실과 함께 판소리도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구나 관객들은 새로 등장한 서구 근대극이나 영화에 매료되어 더 이상 판소리나 창극에서 재미를 찾지 않았다. 2003년에는 한국에서는 판소리가 유네스코의 ‘인류구전 및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그 보존과 전승을 가 책임지고 이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보존·전승과는 별도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살아 있는 판소리로 거듭나고자 하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반주 있는 판소리나 춤과 함께 어우러지는 판소리, 창작판소리의 공연 등은 급변하는 시대 인식을 수용하고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답글 남기기